인간과 인공지능(AI)의 대결.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다섯 차례 대국은 우리를 공상과학영화(SF) 속으로 끌어들였다.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인공지능 세상이 벌써 발밑 아래 와버린 것에 경악했고, 그럼에도 끝내 좌절하지 않는 한 인간의 모습에서 벅찬 감동을 받기도 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은 구글이 마련한 빅이벤트였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휘발성 강한 스포츠 행사와는 격이 달랐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미래면서, 우리를 먹여살릴 기회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빅이벤트가 도쿄나 베이징이 아닌 서울에서 열렸고, 그 상대가 커제가 아닌 이세돌이었다는 점은 우리로서는 축복이었다.

현 바둑랭킹 세계 1위는 중국의 커제다. 그럼에도 구글은 이세돌을 선택했다. 이세돌은 지난 10년간 세계 1위였고, 축적된 데이터(기보)가 많기 때문이라는 게 구글의 공식적인 답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세돌과 한국을 선택했다고 보기 힘들다. 구글이 이벤트로만 생각했다면 13억 소비자가 있는 중국을 택하는 것이 유리했다. 답은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CEO)인 데미스 하사비스의 카이스트 연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사비스는 카이스트를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한국의 역동성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천재 벤처인의 눈에 한국은 최고의 테스트베드(실험장)이었을 것이다.

이세돌은 단 1승만 건졌다. 완패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진정성 때문이다. 0-3으로 몰린 위기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던 집념과 밤을 세워 새로운 수를 연구하던 열정은 오래전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과 닮아 있었다. 40년 전 한국은 성장을 외쳤다. 가족끼리 오손도손 모여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집이 필요했다. 새벽이슬을 보며 출근했고, 별을 보며 퇴근했다. 지표는 우리의 노력에 보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숫자의 노예가 됐다. 좋은 건물보다 많은 건물을 지어야 했고, 얼마나 튼튼하고 내구성이 있느냐보다 얼마나 빨리 짓고 많이 남기느냐가 관심사가 됐다. 숫자가 멈추는 순간 우리의 파티도 끝났다.

어느새 2%대로 떨어진 성장률에, 실업에, 전세난에 삶은 팍팍하다. 대기업에 먹거리를 빼앗겨 버린 중소기업은 위태위태하고, ‘골목대장’ 대기업마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넘쳐나는 비정규직에 청년들은 ‘헬조선’을 외친다. 한국은 10년 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다.
이 암울한 저성장 시대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이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답은 이세돌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세돌은 완패로 끝난 이번 대국에 대해 “원없이 즐겼다”고 했다. 이세돌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았다. 바둑을 즐겼고, 그 즐김 속에서 집념과 열정이 불을 뿜었다.

생각해 보자. 첫 건물을 짓던 날, 혹은 다리를 완공하던 날의 벅찬 감동을. 내가 만든 건물에서 즐겁게 살 사람들, 내가 만든 다리를 안전하게 건너는 차량을 상상해 보지 않았던가. 표면적 성장이 지체된 지금, 내면의 즐거움이 그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인공지능’ 알파고가 우리 인간에게 던져준 교훈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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