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등록기준으로는 좀비기업을 없앨 수 없다. 강소기업을 양산하려면 공공발주기관의 혁신을 통한 변별력 강화가 필수조건이다”

국내 건설시장은 수요에 비해 공급업체 수가 너무 많다는 주장이 대세다. 배경에는 페이퍼 컴퍼니, 유령회사, 좀비기업 등이 많은 이유 때문이라 한다.

개인이나 기업은 주택이나 업무용 건물을 건설할 경우 업체 수가 많은 것을 전혀 문제시 않는다. 많고 적음보다 자신의 집이나 건축물을 제대로 지어줄 수 있는 업체를 발품을 팔아서라도 찾는다.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수요에 비해 공급자가 많은 것은 수요자 입장에서는 반길 만한 호재다. 거래에서 수요자가 흥정 주도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끌고갈 수 있음을 안다.

좀비 업체가 많은 배경에는 산업의 목소리가 시장 개방과 맞물려 상승 작용을 했다. 1980년대에는 내수시장에서 공급체 수는 면허제와 업체들의 입김에 의해 통제가 가능했다. 시장을 나눠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제도와 업체들이 만들 수 있었다. 1995년 WTO 협정에 따라 더 이상 내수시장 울타리를 업체들이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면허제가 등록제로 변경됐다. 등록제는 임시방편으로 장기적으로는 신고제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면허제에서 등록제로 간 이유는 시장 개방에 대비해 국내업체의 경쟁력을 글로벌화시키자는 의도가 있었다. 면허제에서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던 개인사업자의 불만도 작용했다. 연구계에서도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 시장의 예를 들어 사업자 등록 요건을 완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선진국을 벤치마킹하면서 너무 가볍게 넘어간 부문이 있다. 등록 요건은 완화시키되 입찰참가 자격을 강화시켜 기술력이나 재무 및 경영 여력이 부족한 업체를 시장에서 퇴출하는 제도 강화다. 시장 진입문턱은 낮추되 공사 진입장벽을 높여 누구나 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닌, 능력을 갖춘 기업만이 참여할 수 있는 산업생태계를 갖춰야 한다는 논리다.

공사 진입장벽의 첫째 관문은 PQ다. 변별력을 강화시켜 스크린 장치를 해 놓으면 업체 수의 많고 적음보다 역량을 갖춘 기업만이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 논리가 다수의 목소리에 의해 힘을 잃어버렸다. 쉽게 건설업 등록을 한 업체의 절대적인 목소리가 PQ의 변별력을 잃게 만들어 버렸다. 변별력 상실이 이번에는 발주자의 역할과 전문성에 힘을 잃게 만들었다. 변별력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발주기관의 전문지식과 경험, 그리고 판단 역량이 일정 수준 이상이 돼야 한다. 발주기관의 전문성은 순환보직이라는 제도에 의해 기회를 박탈당했다. 객관성과 투명성이라는 이유로 발주기관의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시켰다.

대신 중앙조달이 발주기관의 역할을 대행하는 제도가 더욱 심화됐다. 2006년도에 만들어진 ‘공공기관운용에 관한 법률(공운법)’은 국가가 아닌 공공기관까지 발주자의 재량권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공운법에 의무화는 아니지만 권장하는 문구가 삽입됐다. 감사원의 지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공공기관이 국가계약법을 준용하며 중앙조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중앙조달기관은 객관적인 방법으로 변별력은 낮추고 가격으로 낙찰자를 선정하는 ‘운찰제’가 지배하는 환경을 만들어 버렸다. 객관성과 투명성만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지금의 등록기준으로는 좀비기업을 없앨 수 없다. 강한 기술력을 가진 강소기업이 양산될 수 없는 구조다. 운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환경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기술력을 강화시키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할 기업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 건설 강국에서 강한 기업, 100년이 지난 글로벌 챔피언 기업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등록 기준이 아니라 강한 변별력 때문이다. 강한 변별력 뒤에는 강한 발주기관이 있다. 선진국일수록 건설산업을 혁신시키는 동력을 산업체보다 발주자 혁신부터 시작하는 이유다. 강한 강소기업 없이는 정부와 산업이 공동의 목표로 삼고 있는 글로벌 시장 확대도 불가능하다.

좀비기업을 없애고 강한 중소기업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국내시장이라는 닫힌 공간, 상자를 깨뜨려야 한다(out of box). 국내 관습과 관행, 제도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강소기업을 양산시킬 수 없다. 월드컵을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히딩크나 슈틸리케 감독을 영입하는 이유는 골목축구가 아닌 글로벌 축구 전략의 필요성 때문이다. 유능한 감독이지만 선수는 여전히 국내 선수다. 감독(정책과 전략)과 전술(제도)이 자원(선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다. 외국인 감독 영입에 비싼 비용을 지불해도 국민들은 아무런 불평이 없다. 결과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 한국건설의 미래가 달려 있다 확신한다면 변별력 강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동시에 공공발주기관의 혁신을 통한 역량 제고는 변별력 강화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제도로 인해 잃어버린 경쟁력을 제도로서 되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복남 서울대학교 건설환경종합연구소 산학협력중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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