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한 청년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나이 열아홉,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였다. 그가 우리를 울린 것은 ‘사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가방에서는 한 끼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이 나왔다. 그는 시간에 쫓겨 밥먹을 시간조차 없었던 비정규직이었다. 그는 홀로 일하다 지하철에 부딪혔다. 메뉴얼은 ‘2인1조’였지만 애초에 불가능했다. 근무조 6명이 49개 역을 맡아야 했다. 그러고도 이 청년이 받은 월급은 144만원.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은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그의 죽음을 ‘사회적 살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청년의 어머니는 “책임감이 강하고 떳떳하고 반듯하라고 아이에게 가르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스크린도어를 홀로 고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이 청년뿐이 아니다. 2013년에도, 지난해에도 있었다. 그들도 용역직원이었고 저임금을 받았다.

현장일은 험하다. 힘도 많이 들거니와 위험하다. 감전의 위험이 있고, 붕괴의 위험이 있다. 그리고 충돌과 낙상의 위험도 있다. 사고는 한순간이다. ‘아차!’ 하는 순간 삶이 바뀌어 버린다. 그렇다고 이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렇다면 제값은 쳐줘야 하지 않는가. 험하고도 위험한 일이라면 노동의 대가도 넉넉해야 옳다. 사람 목숨값이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숭고한 것이라면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일은 비싸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다. 언제부턴가 현장일은 싸구려 노동이 돼 버렸다. 비용절감 명목하에 외주화가 진행됐고, 용역업체는 같은 이유로 비정규직을 고용했다. 건설, 정비, 안전, 경비 등 ‘현장’에 있는 직업은 죄다 저임금화되고 있다. 원청업체 아래 하청업체가 있고, 하청업체 아래 또 하청업체가 있다. 하청업체 아래는 비정규직 직원이 있다. 임금도 깎는 곳이 안전에 대한 투자를 넉넉히 할 리가 없다. 저임금 근로자들은 부족한 돈을 벌충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제 몸을 돌아볼 겨를조차 없다. 임금은 낮아지고 위험도는 높아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런 근로자가 수행하는 일의 질이 높을 리 없다. 부실공사, 부실관리, 부실정비가 잇따르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그 피해는 돌고돌아 결국 나와 내 가족에게 돌아온다. 남편이, 아내가, 아이가 안전사고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 사고는 그렇게 연결된다. 그게 사회공동체다.

문제는 우리가 돈이 없어 이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도둑놈이 많다. 구의역 스크린도어는 반값 시공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년이 속했던 용역회사는 공기업인 서울메트로 퇴직자들이 장악했다. 청년이 월 144만원에 목숨을 걸때 공기업 퇴직자들은 400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건설업체와 현장 일꾼이 가져가야 할 몫을 ‘누군가’가 가로챘다는 얘기다. 명백한 강자의 횡포다.

현장을 우대해야 한다. 제값을 주고 일을 시키자는 얘기다. ‘제값’에는 근로자의 임금과 안전에 대한 투자가 모두 포함된다. 가격으로 일감을 따내고, 수익을 남기던 시대는 지났다. 제값을 쳐 주되 그 이상의 고효율을 창출하는 기업이, 사회가 살아남는다. 조선업이, 건설업이 작금의 위기를 맞는 것은 ‘가격’ 때문이 아니던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는 명백한 ‘사회적 살인’이다. 살인마가 날뛰는 데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지 않는가. 살인마의 다음 칼끝이 내 가족을 겨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서운 것은 그 살인을 막을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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