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만화가 이정문 화백이 그린 ‘서기 2000년대의 생활의 이모저모’라는 화면에는 흥미로운 예견이 그려져 있다. 35년 후 소형 TV와 전화기, 전파 신문, 무공해 자동차, 원격 치료와 공부, 태양열 이용 집, 로봇 청소, 부엌 모니터에서 요리법 제시, 움직이는 도로, 달나라 수학여행 등이 가능하리라고 내다봤다. 대부분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처음 들어온 것이 1967년이었고 미국에서 1970년대 후반에서야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했으며 IBM에서 세계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를 판매하기 시작한 해가 1981년임을 고려하면 놀라운 상상이었다. 

33년 후 2050년의 건설산업을 그려보면 어떻게 될까? 허공에 떠다니는 시설물, 생각을 읽어내는 설계 프로그램, 실시간 원가 산정 및 대응 시스템, 원격 무인 건설 및 해체 작업, 자가 진단 및 자율 유지보수의 영구적 자기존속 건축물, 접이식 또는 즉석 설치 해체식 교량, 상하좌우 공간 조절형 시설물 등이 가능할까? 어쩌면 건설산업 자체가 불필요해지고 조립 제작 및 유통 서비스로 대체되지는 않을까? 

현재의 생각과 상상이 미래를 만든다. 현재 생각(상상)할 수 없는 건설 산업이 미래에 혜성같이 등장하기란 어렵다. 물론 우리의 생각은 현재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지만 현존의 발판 없이는 발돋움하기가 불가능하다. 현재 건설 산업은 건강하지 않다. 상처가 아물지 않고 맥박이 고르지 못한데 마냥 건재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17세기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정언(定言)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두 가지 뼈대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일이 불확실하고 의심의 대상이 돼야 하지만 우리가 생각(의심)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주체로서 우리의 살아있는 존재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실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세상만물이 명확한 실체가 아니고 가변적일 수 있으므로 오감에만 의존하지 말고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대상을 쪼개어 살펴보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우리의 생각하기(思惟)와 우리의 존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건설 산업에는 의심할 거리가 투성이로 널려 있다. 기본설계에서부터 입찰 내역서, 행정 절차와 비용, 실재 투입 자재의 품질과 용량, 노동 숙련도, 토질과 지하구조, 기후변화와 내구성, 공기(工期)와 안전, 발주자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환경과 여건에서 목적물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확실하게 하고 가변적인 것을 안정적으로 고정시켜 달라고 매달려서는 안 된다. 불확실하고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매달리는 건설하기(!)가 건설산업의 존재의 이유가 돼야 한다. 의심의 지뢰밭에 불확실성이 산재해 있어서 부조리와 부실의 오명이 복병처럼 튀어나올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건설활동을 멈출 수 없다. 경기의 극심한 굴곡, 산업과 직업 매력도의 저하, 세련미의 저하, 발전 가능성의 구조적 저하와 사양화 등 건설산업이 천대받을 여건들은 겹겹이 쌓여있다 하더라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건설산업 자체의 존재성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2050년 미래 건설 산업은 존재할 것인가? 건설 산업의 가치를 무엇으로 입증할 것인가? 건설 산업에 대한 의혹과 불신을 잘게 쪼개고 또 쪼개어 오로지 건설 서비스 그 자체만 고유하게 남겨야 한다. 자연에 옷 입히기에 익숙한 건설 산업이라 하더라도 의심의 화살에 맞서서 스스로 알몸이 되어 존재의 진가를 드러내야 한다. 장식품으로 위장했던 시공 역량과 원가 견적, 두툼하게 겹겹이 걸쳐 입었던 위협과 엄살과 갈등의 외투, 달콤한 미끼에만 현혹됐던 전문화와 융복합화 역량을 민낯으로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생존의 열망을 북돋우어야 한다. 건설 서비스가 아니고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회적, 자연적 공간과 시간을 창출해내는 살아있는 움직임(活動)으로 승부해야 한다.

건설 산업과 건설인이 생존하려면 살아있음을 관찰할 수 있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불확실성과 가변성이 높다 하더라도 굴러가는 자전거 바퀴처럼 건설 산업은 현장에서 움직이는 현재진행형이 돼야 한다. 봄은 달력에서 찾을 수 없다. 개나리와 진달래와 철쭉을 보고 봄바람을 감지하고서야 봄날임을 실감하게 된다. 건설 산업의 존재는 외침이나 백서에서 확인할 수 없다. 건설 서비스가 현실에서 꿈틀거리며 이행되는 흔적을 보고서야 실제적 생존을 알 수 있다. /명지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건설경제산업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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