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모임이 있어 세종에서 서울로 갔다. 약속장소는 종로였다. 잘나간다는 경리단길도 아니고, 홍대 앞도 아니고 서촌도 아니고 종로라길래 다소 의아했다. 내 기억 속의 종로는 그닥 대단한 것이 없었다. 좁고 굽은 골목길에는 쾌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낡은 처마를 이고 있는 단층건물들은 벌레 몇마리가 기어다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무엇보다 10여 년 전에 피맛골이 사라진 뒤로는 통 지나가지 않던 종로였다. 종각역에서 내려 YMCA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뭔 이런데서 약속을 다 잡느냐”며 연신투덜댔다.

그런데 발걸음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도심 고층빌딩의 스카이라인 아래로 골목을 따라 낮게 어깨를 마주한 한옥이 이어졌고, 한옥들은 아기자기한 카페들을 머금고 있었다. 그곳은 종로구 익선동이라고 했다. 골목마다 커피 볶는 향이 퍼져나갔고, 카페마다 청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지역은 재개발이 예정된 곳이었다. 피맛골이 헐려나갔던 것처럼 대형 빌딩들이 거인처럼 떼를 지어 곧 몰려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종로구 익선동은 2004년 재개발이 가능한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가 2014년 재개발이 무산됐다고 한다. 10여 년간 주민들은 최소한의 보수만을 하며 살아왔는데, 이 때문에 익선동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 만큼 동네의 정겨움은 커졌다. 그러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15평 남짓 작은 한옥들이 개성 있는 카페와 식당으로 하나씩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맥주집과 게스트하우스도 들어섰다. 큰 한옥집이 있는 북촌과 달리 익선동은 서민 한옥촌이다. 그러다 보니 아기자기함으로 따지면 익선동을 능가할 곳이 없다. 2014년부터 시작된 변화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아는 사람들에게는 화제가 됐던 모양이다. 2012년 말부터 세종에 있었으니 나는 그런 변화를 알 수가 없었다.

길게 익산동 이야기를 꺼낸 것은 도시재생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어느 때부터인가 재개발 대신 도시재생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개발 시대의 전면 철거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낡은 도시의 정취를 그대로 살리면서 사람이 편안히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도시재생이다. 풍수에 능한 한 도시학자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터를 잡았다는 것은 다른 곳보다 살기 좋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미래에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연말 다녀왔던 부산도 상황은 비슷했다. ‘하코방(상자갑 모양의 작은 집)’이 빽빽히 들어선 산복도로들도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거친 오르막 계단길 옆으로 모노레일이 설치됐다. 지역주민에게는 편리한 교통시설이 됐고, 관광객에게는 관광시설이 됐다. 이른바 ‘초량이바구길’이라 불리는 곳인데 이곳도 주변건물들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이런 도시재생을 보면, 비로소 건축이 살갑게 느껴진다. 힘으로 허물고 짓는 불도저가 아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에 가까운 건축. 학부 시절 건축이나 토목을 공부해 봤으면 어땠을까라는 부러움이 이는 것은 이때다.

변화는 국토교통부에서도 느껴진다. 며칠전 만난 한 고위관계자는 “이제는 대형 SOC(사회간접자본) 투자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우리도 도시재생에 대해 ‘열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고 보면 이번 대선에서 대형투자를 얘기하는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재생에 수십조를 쓰겠다는 후보는 있다. 차기 정부는 도시개발의 프레임이 확연히 바뀐 첫 번째 정권이 될 수 있을까? 그러길 희망한다.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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