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재생 공공개발은 재개발과 달리
예전 도심을 살려야 한다는 점에서
기억과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도시개발과 예술의 어긋남을 반성하며
늦었지만 새로 손잡아 참 다행이다”

도시 개발에 거센 새 바람이 분다. 

도심을 벗어나 교외 개발에 열을 올리던 데서 도심 개발로 선회한 것이 그 첫 번째 바람이다. 도시가 나이들어가면서 생긴 변화다. 두 번째 바람은 도심 개발 방식에서 불고 있다. 옛 것을 갈아엎는 재개발 방식에서 재생 방식으로 돌아서고 있다. 세 번째, 도시 개발이 민간사업자, 지방정부 중심에서 점차 공공개발로 전환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도시 개발에 부는 이 세 가지 새 바람을 묶어 최근 도시 개발을 ‘도심 재생 공공개발’로 규정하기도 한다.   

새로운 세 가지 바람이 함께 부는 도시 개발 풍경에 멋진 자태로 나타난 새로운 주체가 하나 있다. 전혀 건설, 토목, 개발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주체다. 그동안 도시 개발, 도시 계획 등과는 척을 지거나 대치 상태에 있던 존재다. 그러던 주체가 도시 재생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다는 찬사를 받으며 등장했다. ‘예술’이 그 주인공이다. 

도심 재생에서 문화예술 구역을 만들거나 예술가의 참여를 독려하는 일은 일상적 행정 과정이 됐다. 젠트리피케이션 등과 같은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심 재생 사업은 예술인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인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개발 참여에 부응하는 대접을 받고 있진 못하다. 여전히 의심어린 눈초리도 남아 있다.  

예술이 과연 새로운 도시 개발 패러다임과 궁합이 맞는지, 과연 도시 개발을 선도할 만큼 많은 공부를 했는지, 얼마만큼 전문가적 경험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당연한 질문이고, 예술가들이 잘 설명하며 대답할 책무도 있다. 

우선 짧게 “당연하다”고 답하고 싶다. 도시 개발의 새로운 바람이 과거 난개발 혹은 대형 재개발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인데 그 반성을 촉발한 주요 주체가 곧 예술이었다. 실제로 예술가들은 난개발을 반대하는 예술행동을 펴 왔다. 그 운동을 통해 도시에 기억이 남게 하고, 기억을 통해 도시인들이 정체성을 갖게 도왔다. 무모한 대형 개발로 폐허화된 도심 내 대형 건물을 신기술 기반의 예술 활동 공간으로 전유하기도 했다. 삭막하던 도시 공간에 공공예술 공간을 만들 조례, 법 제정도 예술가가 움직여 얻어낸 성과다. 

도시는 예술가의 등을 밀고 도시 바깥으로 나가게 했지만 예술가들은 도시와의 연을 끊지 않고 지키고, 새로 만들기를 반복했다. 그들이 도시를 더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낸 예는 굳이 외국을 둘러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허다하다. 석유비축기지를 재생해낸 문화비축기지, 홍대 앞의 인디 음악 공간, 세운상가 재생사업, 창동의 플랫홈 61, 문래동의 문래예술공단 등이 발품을 팔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예의 공간이다. 

모두를 성공 사례라 할 순 없지만 이 공간에서의 도시 재생 사업이 예술을 빼고는 시도조차 어려웠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도심 재생 공공 개발’은 일반적 개발과 차이나는 특수성을 지닌다. 다시 살려 내기 위해서는 현 생태계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따라야 한다. 그래서 생태계 내 요소들 간의 소통을 전제로 한 공공성이 챙겨져야 한다. 예전 도심을 살려야 한다는 점에선 기억과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전문가를 꼽으라면 그곳을 거점으로 살아왔던 예술가를 빼고는 딱히 떠올릴 만한 주체가 없다. 도시 개발과 예술의 만남이 어긋났던 점을 반성하며 늦었지만 새롭게 손을 잡아 ‘희한한 한 쌍’이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큰 비용 지출없이, 사람이 편해지고, 사람끼리 우정 있게 만나고, 행복이 지속되는 것은 도시 개발이나 예술이 공동으로 나누어 가진 목표다. 도시 개발의 새로운 바람은 애초 한몸이었던 도시와 예술을 재 상봉케 하는 중요한 계기인 셈이다. 

이미 새로운 바람이 불었던 성공 지점들에서 벌어진 만남을 소중히 살피며 키우고, 퍼트리는 작업을 도시 개발과 관련된 여러 주체들이 가열차게 해낼 때다.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저작권자 © 대한전문건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