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월세는 늘 이사준비 불안감,
잦은 이사에 따른 공동체 지체,
부진한 공동체 형성에 따른
인간 유대의 실종 등등
끝없는 사회불안을 낳는다”

점차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미디어를 대하며 지내는 시간도 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국민 일일 평균 2시간 정도를 이동을 위해 쓴다고 한다. 미디어 이용 시간은 2시간30분 정도에 이른다. 눈 뜨고 있는 시간의 사분의 일 정도를 길과 미디어 안에서 보내는 셈이다. 그 시간 동안에는 사람을 직접 대하며 유대를 쌓는 대신 이동, 소비, 가상 커뮤니케이션을 주로 행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길과 미디어 같은 공간은 ‘비장소’라고 칭했다. 삶을 ‘비장소’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차 늘어나는데 그럴수록 인간의 삶 자체가 걱정의 대상으로 변해 간다고 오제는 파악한다.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은 인간 유대의 유무로 이뤄진다. ‘장소’의 대표적인 예는 집이다. 집 안에서는 식구끼리 서로 아끼고 연대하며 일상을 지낸다. 서로 아끼니 한 식구라는 유대감이 생기고 그 유대감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정체성이 형성된다. 유대와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장소’에 대비되는 공간이 ‘비장소’다. 그곳에서 타인은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지나친다. 유대 대신 외면이 발생한다. 외면을 행하면서 자신을 방어한다. 그런 ‘비장소’엔 애정, 유대 대신 외면과 소외가 팽배한다. 스쳐가는 곳으로 인식되면서 언제든 시간을 보내버리면 그만인 곳이 되고 만다. 공항, 지하철역, 여관, 쇼핑몰 등이 ‘비장소’의 대표적 예다.

오제가 ‘비장소’를 특정하고 그 곳이 늘어남을 지적한 것은 ‘비장소’가 사회 불안의 원천이 될 잠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쳐가는 공간인 ‘비장소’에는 타자의 현존이 없다. 그곳에선 타자와 맞닥뜨리지 않는다. 타자는 스쳐지나는 존재이기에 직접 소통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안에서 개인은 모두 익명성으로 살게 된다. 삶의 지혜를 쌓을 시간을 갖지 못하고, 타인을 직접 만나지 않음으로 인해 방어적 개인주의가 늘어난다. 집안 화장실과 지하철 역안 화장실의 위생성에 차이가 나는 것이 그 극명한 예다. ‘장소’ 공간인 집 화장실에선 이용 전후에 익명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비장소’ 공간인 지하철역 화장실에서는 모두가 익명 사용을 한다. 이름을 갖지 않은 채 사용되는 ‘비장소’는 그래서 늘 위생 문제, 청결 문제를 낳게 된다. 

오제가 ‘비장소’를 근심의 눈초리로 보면서 내놓은 제안은 간단하다. ‘비장소’를 줄여가고, ‘장소’를 더 늘리는 일이 범 사회적으로 이뤄져야 함을 강조한다. ‘비장소’를 ‘장소’로 바꾸어 가는 일도 소중한 프로젝트라며 재촉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많은 경우 ‘장소’ 공간이 아닐 수 있다. 2017년 주택 점유 형태 통계에 따르면 자가 거주가 57.7%라고 한다. 보증금 낀 월세가 19.9%, 전세는 15.2%를 기록하고 있다. 나머지는 그보다 더 열악한 주거 형태라고 보면 인구의 40% 이상이 언제든 이사를 준비해야 하는 ‘비장소’적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집을 대표적인 유대의 공간, 안정의 공간이라고 오제는 말했지만 한국에 이르면 사정은 확연히 달라지는 셈이다.  

오제의 ‘비장소’ 개념을 한국 주택문제에 대입해보면 한국의 주택문제는 늘 경제문제 이상이 된다. 전월세는 늘 이사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는 시간의 켜가 쌓이질 않는다. 매년 혹은 매 2년마다 임대를 놓고 재계약을 해야 하기에 보이지 않는 타자가 늘 집안에 눌러 앉아 있는 느낌을 준다. 언제 옮겨갈지 모를 공간이 되다 보니 애정을 전하기가 녹록치 않다. 전월세를 사는 이들은 집 안에 살지만 이동을 준비하는 ‘비장소’ 경험을 매일같이 하게 된다. 그로써 비장소가 만들어내는 사회 불안이 전월세를 사는 이들에게 나타난다. 늘 이사를 준비해야 하는 불안감, 높은 이사 빈도에 따른 공동체 형성의 지체, 부진한 공동체 형성에 따른 인간 유대의 실종 등등 사회적 불안은 끝 간 데가 없다. 이쯤되면 주택문제는 경제문제, 삶의 질 문제를 넘어 인간 실존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온 사회가 주택문제에 관한 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해박하지만 한계는 뚜렷하다. 주택문제를 아직까지도 정신적 복지의 문제, 인간 실존의 문제로까지 연장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생활문제, 경제문제로 제한시킨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사회 전체가 병을 앓게 된다는 의식까지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남을 쉽게 외면하고, 자신을 방어하며 철저한 개인주의로 진입하며, 사회적 유대를 길바닥 껌처럼 여기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걱정을 않고 있다. 주택문제가 사회가 죽는 문턱쯤 된다는 심각성을 언제쯤 온 사회가 피부로 느끼게 될까.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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