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진 교수

일제하 경성의 카페 풍경을 적은 한 글이 1929년 9월 ‘별건곤’ 잡지에 등장한다. 카페에서 한량들이 턱없이 많은 팁을 던지며 거들먹거린다는 내용이다. “… 어여쁘게 가장한 ‘웨트레쓰’들의 환심을 사려고 10전, 20전이면 족할 ‘팁’(쁫지)을 1, 2원씩이나 풍풍 내던지며…”. 건설 현장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뽀찌’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일본 칸사이 지방에서 주로 사용하는 웃돈, 팁, 뒷돈을 의미하는 말이라 한다. 건설 현장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다른 곳에선 좀체 들을 수 없는 그 말이 아직도 살아 숨쉬는 것일까.

‘뽀찌’가 일반 대중의 귀에 다가가게 된 데는 타워크레인 관련 보도가 한몫을 했다. 얼마 전부터 건설 현장 타워크레인 기사들이 과도하게 ‘뽀찌’를 요구한다는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덧붙여 노조를 앞세워 그런 관행이 벌어진다며 분개하는 기사들로 이어졌다. ‘뽀찌’를 요구하는 정도가 지나치다 보니 무인 타워크레인의 사용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안전과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고 있는 특정 업종 기사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반박도 함께 전해 온다. 타워크레인을 둘러싼 보도가 전에 없이 늘고, 그 중심에 ‘뽀찌’ 언급이 있었고, 그 말뜻을 알게 된 시민도 늘었다.

‘뽀찌’ 관련 보도를 시민들은 술상 위 안줏감으로 올리기도 하지만 건설업계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타워크레인 현장과 ‘뽀찌’ 땜에 화가 잔뜩 난 영역 간에는 불신과 반목이 흘러넘친다. 위험이 넘치는 건설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증오해 불지옥 같은 공간이 되고 있다. 글을 준비하기 위해 ‘뽀찌’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크레인 기사에게 ‘뽀찌’를 주었다는 현장 간의 댓글 설전이 살벌함을 넘어 살기를 느낄 정도다. 이를 잘 분석해 건설 현장의 모순을 전달하는 조직학자 혹은 사회학자가 ‘뽀찌의 사회학’이란 글을 정리한다면 십중팔구는 건설업의 정점인 대기업 건설사나 그를 관리 감독하는 행정관청에 책임을 돌리는 일로 결론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르게 사태가 벌어진다. 타워크레인 기사, 노조, ‘뽀찌’로 화가 난 사람 즉, 건설계 밑바닥에서의 갈등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뿐이다.

건설에서는 ‘뽀찌’라는 말보다 더 자주,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하나 있다. ‘관행’이란 말이다. ‘관행’은 건설업에서 모든 모순을 덮는 힘을 지닌다. ‘뽀찌’가 문제라고 하면 ‘관행’이었다고 덮거나 혹은 반박한다. IMF 이후 건설업에서 외주 비율의 확대, 그로 인한 비정규직의 증가. 불안전 고용에서 오는 안전 불감증 등의 문제를 ‘뽀찌’의 근원이라고 지적을 하면 그 또한 ‘관행’이라고 덮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선 그 어떤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관행’이라는 문지방을 넘지 못하면 건설 현장은 영원히 뉴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뽀찌’ 문제를 논의하는 관행을 바꿔야 하는 이유다.

‘뽀찌’가 존재하는 한 그것과 관련해서 자랑스러울 사람은 없다. 주는 쪽, 받는 쪽, 그리고 눈감는 쪽 어느 편이든 부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마무리되어선 ‘뽀찌’와 ‘관행’은 늘 살아 숨쉬게 된다. 조금이라도 ‘뽀찌’와 ‘관행’을 더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는 더 나쁜 쪽을 찾아서 발라내고 비판의 날을 벼려야 한다. 모두가 나쁘지만 더 나쁜 편이 있고,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곳이 있음을 판정해야 한다. 유인 타워크레인에서 무인 타워크레인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의 책임을 ‘뽀찌’를 받으려는 타워크레인 기사에게 돌리는 일은 반쪽 모순 타파에 지나지 않는다. ‘관행’적 분석을 넘어 근원적 모순을 찾아내는 사회 노력이 더 경주돼야 한다. 공기 단축과 비용절감이라는 관행을 상식으로 생각하며 하달해내는 최정점, 그리고 그에 대해 눈을 감는 관리감독 행정 기구를 탓하지 않고선 그 현장은 언제나 위험, 불신, 모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뽀찌’를 다루는 언론은 화수분 같은 건설업이 있어 즐거울 순 있다. 시민들도 술상의 안주거리 삼아 웃으며 힐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위험의 그림자 속을 거니는 우울한 존재자가 돼야 하고,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직업, 사업이라는 지적으로 고통받아야 한다. 그런데 건설업이 마주하는 고통은 궁극적으로 언론과 시민들에게도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건설업의 비용은 그 안에서만 마무리되지 않는다. 이어지고 연결돼서 결국 우리 자신에게도 돌아오며, 오롯이 공동으로 피해를 감수하게 된다. 건설업 내 ‘뽀찌’의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갖고 함께 단호하게 풀어나가야 할 이유다.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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