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행위나 사물에 하나의 기능만을 점찍어 설명하는 일은 어딘지 낡은 태가 난다. 건강할 목적으로 운동한다고 말했다간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멋있어지고, 여가 시간을 재밌게 보낼 기대로 열심히 땀을 흘린다. ‘쇼핑 갈까?’라는 말은 중의적일 수밖에 없다. 같이 바람 쐬면서 시간을 보내고, 사람 사는 꼴들도 보고, 여유가 되면 물건도 사자는 엄청나게 복잡한 뜻을 가진 ‘쇼핑’이 되고 말았다. 멋진 자동차엔 얼마나 많은 의미가 뒤를 따르는가. 스포티함, 부유함, 감각 있음, 여유 있음 등의 잉여 의미가 차를 뒤덮는다. 이미 자동차는 먼 거리로 빠른 시간 내로 데려다 주는 쇳덩어리 지위를 넘어 섰다.

공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시장, 마트, 백화점은 더 이상 물건을 고르고 사는 곳이 아니다. 그 기능을 온라인 쇼핑에 넘겨준 지 오래됐다. 시장, 마트, 백화점은 온갖 볼거리를 배치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사물, 이벤트, 환경을 설치해 사고파는 기능을 훌쩍 넘으려 한다. 단순 기능 공간임을 부정한다.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라는 단순 기능으론 온라인 공간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국내 굴지의 이마트, 롯데마트가 적자를 면치 못하고 매각을 고려 중이라는 뉴스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단순 기능을 탈출하지 못한 탓에 벌어지는 예정된 수순 같아 보인다.

2019년 연말의 가장 뜨거웠던 비즈니스 뉴스는 ‘포방터 돈가스점’ 이전 사건이었다. 방송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후, 유명세를 치르느라 장사하던 곳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돈가스집 사연이다. 가게는 서울에서 제주도로 옮겨갔다. 원래 장사하던 곳보다 훨씬 좋은 환경을 얻게 됐다 한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조언을 전해주는 백종원 씨 도움으로 그의 호텔 인근 건물에 입점했다. 제주도에서 문을 연 첫날 무려 12시간 전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한다. 대여섯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은 한정 판매 탓에 먹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10여 시간을 넘게 기다리게 만든 힘은 굶주림이 아님에 틀림없다. 식당이 밥 먹는 기능을 가진 곳이라는 상식을 깼기에 돈가스점 사건이 온 사람의 주목을 끌었다.

자정부터 돈가스집 앞에 줄을 서게 한 주요 요인은 무엇일까. 12시간을 기다린 사람은 자신이 첫 번째 손님이 되기를 학수고대했을 거다. 수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남보다 먼저 먹고, 기억에 남기고, 또 기록으로 전파하는 재미를 추구했다. 이미 유명해진 돈가스점 사장, 주방장을 만나고 그들의 성실함을 직접 경험하는 짜릿함을 느끼자는 마음들도 있었을 게 분명하다. 성실하면 성공한다는 상식을 확인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공익성을 내세운 고객도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이미 식당은 밥 먹는 장소임을 훌쩍 뛰어넘어 섰다. 추억, 기억, 체험, 공익성, 즐거움으로 촘촘히 짜인 공간이 됐다.

돈가스점이 제주도로 이전하기 전에 제주도청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제주도로 가게를 이전하면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던 모양이다. 이미 올레길, 등산길, 명승지에 온갖 이야기를 붙여 이야기판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해온 도청다운 제안이었다. 방송을 통해 넘칠 정도로 이야기를 가지게 된 가게의 힘을 읽어냈고 그를 활용하려 노력했다. 도청보다 수완이 더 좋은 백종원 씨가 돈가스점을 자신의 호텔 근처로 유치해냈다. 그리고 그는 돈가스집 이야기를 우려내 자신의 비즈니스에 잘 활용하고 있다. 이야기를 가진 사람, 가게, 공간을 빌딩 안으로 혹은 도시로 끌어들이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이야기가 없으면 이야기를 꾸려서라도 빌딩에, 도시에 붙여주고 새롭게 공간의 의미를 갖자고 권유하는 사건으로 비친다.

2020년은 이야기가 건설, 건축, 도시 개발, 도시 재생과 본격적으로 어우러지는 해가 되길 희망해 본다. 우리 삶의 켜 속에 담겨 있거나, 일상의 옆구리에 자리를 틀고 앉은 그런 이야기를 찾아내 건물이나 도시 공간을 채색하길 요청한다. 그로써 빌딩이 유형 물질의 건물임을 넘어서 기억, 추억이며 즐거움의 소프트웨어가 되어 갈 것이다. 도시 또한 그에 힘입어 거닐어 즐겁고, 사람 살았던 흔적의 켜로 정겨움을 자아내는 문화공간으로 변모해 갈 것이다. 이야기가 있는 집, 도시,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조합이다.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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