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당시에는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는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독특한 그림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회화 안에 담긴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줄 만큼 어두운 세상을 풍자해내며 당시의 미술 전통을 역행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게 해주는 작품 ‘바보들의 배’는 배를 젓는 동력도, 방향을 가늠하는 방향타도, 주변을 살피는 척후도 없는 멍텅구리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배를 탄 사람 중에 누구도 그를 걱정하지 않은 채 제 먹을 것, 제 놀음거리, 제 주장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15세기를 풍자했지만 그의 그림은 현 세상에 대한 풍자로도 손색이 없다.

신문 지상과 텔레비전 뉴스에 등장하는 부동산 뉴스를 대할 때마다 ‘바보들의 배’를 겹쳐 떠올린다. 모두 떠들지만 제각각인 경우가 많고 떠든 볼륨에 비해 가져올 만한 정보는 없다. 부동산 정책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이도 없고, 어디쯤 우리가 와 있는지를 제대로 말하는 이는 더더욱 찾기 어렵다. 제대로 모범적인 부동산 대책을 가진 해외 사례를 알려주는 측이 없음은 물론이다. 부동산 뉴스는 늘 심각한 얼굴로 등장하지만 늘 같은 소리를 내고, 같은 공간을 빙빙 도는 ‘바보들의 배’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부동산 뉴스가 그런 모양새를 갖추는 데는 뉴스 내외적 조건이 버티고 있다. 우선 외적으로 보아 부동산 사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갖춘 데가 없다는 결정적 흠결이 있다. 정부는 늘 땜질 조처였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 정책의 수혜자를 바꿔 갔다. 심지어 부동산 정책을 경기 부양책과 연동까지 해댔으니 부동산 뉴스가 바보가 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부동산 뉴스가 기댔던 전문가 중 이해관계로부터 자유스러운 자가 없었던 점도 불행한 일이었다. 부동산에 조금이라도 명함을 낼 만한 이들은 부동산 뉴스의 향방에 따라 표정이 달라질 자들이었으니 뉴스가 산으로 가는 것은 뻔한 결과였다.

부동산 뉴스는 내적으로 보아도 첩첩산중이랄 만큼 넘어야 할 장애가 한둘이 아니다. 뉴스를 다루는 이들 중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털어버릴 ‘깔끔한 중립자’가 있을 리 없다. 살까, 팔까, 투자할까, 손절할까 등의 질문을 입에 올리지 않을 뉴스 담당자는 없다. 그러니 뉴스 생산자가 가진 질문으로 수렴되고 그에 맞는 답을 구하게 된다. 스스로 무지를 알지 못하니 전문가를 찾는 눈도 함께 어두워진다. 이해 당사자를 전문가로 소개하는 짓을 반복하기도 한다. 부동산 문제는 곧 아파트 문제인 것처럼 호도하는 일도 다반사로 해낸다. 심지어 자신에게 광고를 대는 쪽의 이야기도 죄의식 없이 뉴스로 포장해 척척 심어주기까지 한다.

부동산 뉴스의 이해당사자가 늘고, 그에 대해 발언해야 할 사람들이 늘게 되니 부동산 뉴스의 양은 엄청 늘었다. 그렇지만 부동산 뉴스의 내외적 조건이 바뀌지 않았던 탓에 양질 전환이 발생하지 않는다. 양이 늘어난 만큼 질적 전환이 이뤄지는 특이점을 만날 때도 된 것 같건만 그 순간이 오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이미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바꿔 낼 겨를도 없거니와 그들을 억지로 끌어낼 재간도 사회가 지니고 있지 못하다. 기껏 극약 처방으로 해볼 수 있는 방도는 부동산 뉴스를 생산하는 판을 바꾸는 일이다. 아파트를 보여주고, 청약을 위해 줄 서는 시민들 보여주고, 전문가 말 듣고, 기자가 결론 내는 그런 방식이 바보스런 항해를 이끌었으니 이제 그를 그만두고 다른 항해를 택해보자는 말이다.

제각각 떠들게 놔둘 일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충돌하는 공간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그동안 내놓았던 정책이 얼마나 허술했고, 비평은 얼마만큼 대안이 없었던지, 뉴스는 얼마나 오랫동안 헛다리를 짚었던지를 스스로 고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가다듬게 만들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지혜를 발휘하자. 늦었지만 부동산 뉴스를 부동산 토론의 장으로 바꾸고, 그로부터 진짜 바보, 덜 바보, 더 바보를 가려내는 눈을 키워나가도록 해야 한다. 부끄러워해야 할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일은 미래의 부끄러움을 줄이는 현명한 선택이다. 그런 일을 만들지 않으면 그동안 ‘바보들의 배’를 바라보기만 했던 시민들을 그 배에 승선시켜 부끄러움을 가늠하는 눈마저 잃게 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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