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했다. 2016년 12월6일,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 여러 명이 국회 증언대에 섰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차 청문회’ 자리였다.

일반인은 (기자를 포함한) 거의 알 수 없는 ‘회장님’들의 화법이 낱낱이 드러났다. 언론 보도에는 매끄럽게 정리된 ‘멘트’로 알려지지만, 이날 생중계된 청문회에선 이들의 어투와 어법, 언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창피했다. 입력된 말만 되풀이하는 로봇, 상황 변화에 일부 대응할 수 있는 ‘AI’(인공지능)라면 차라리 이보다 훌륭한 말솜씨를 드러냈을 것 같았다.

아마 청문회를 앞두고 그룹 관련 직능이 총동원돼 모범 답안을 입력했을 것이다. 입력은 됐지만 회장님들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당연하다. 이날 자리가 기업 가치를 제고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포장하고, 항변하고, 버텨도 부끄럽기만 한 자리였다.

회장님들은 “불민스러운 일에 연루됐다”고 인정했다. “저보다 훌륭한 분 있으면 언제든지 경영권을 넘기겠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는 선언도 있었다.

28년 만이라고 한다. 1988년 12월14일 ‘5공화국 비리조사 국회 특별위원회’ 이후 28년 만에 9개 그룹 회장들이 무더기로 국회에 ‘소환’됐다. 일부는 선친에 이어 두 번째로 국회의원의 호통에 ‘봉변’을 당한 이도 있었다.

대기업은 조그만 잘못에도 도매금으로 매도된다. 한국 경제에 워낙 큰 파급력을 미치기 때문에 그만큼의 책임과 도덕성을 요구받아서다.

이날 청문회에 선 회장님들 중 일부는 ‘날벼락’이라고도 할 것 같다. 사실 미르·K스포츠재단 등에 먼저 문을 두드려 돈을 낸 기업은 없다.

그래도 국민은 용서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8년 전 아버지가 그랬듯 아들이 다시 국회에 불려나온 이날의 장면을 달갑게 본 국민은 없다.

왜 이런 흑역사가 반복되는 것인가. 대기업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 소위 말하는 ‘재벌’의 승계 과정 특혜와 투명하지 못한 의사 결정 구조 등은 권력을 가진 자에겐 손쉬운 먹잇감이다. 아버지 대통령이 그랬듯 딸 대통령 정권도 이를 노렸다. 이번에는 속칭 ‘B급’도 안 되는 ‘비선 실세’까지 끼어들어 재벌을 농락했다. 혀를 찰 일이다.

청문회 말미에 한 국회의원이 “20년 30년 뒤에 (회장님들) 후손이 다시 이 자리에 서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5000만 국민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사실 재벌은 중죄를 지어도 사회 환원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몇 년 뒤 사면·복권되는 비정상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국민 모두가 공범이다. 아무리 그래도 근원적인 책임이 재벌에 있음이 희석돼서는 안 된다. 

대기업 총수들은 이번 청문회를 계기로 정경유착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벌) 누군가가 감옥에 가지 않고는 이런 일은 다시 반복될 것”(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라는 말이 다시 나올 수밖에 없다. 나라를 혼란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지만 역사는 뒷날 이 일의 값어치를 매길 것이다. 그중 하나가 “유구하고 부끄러운 한국 정경유착의 역사가 단절되는 전환점이었다”가 되기를 희망한다. /세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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