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에 재현된 모습이었다. 지난 6일 재계 총수들이 국정조사 청문회 증언석에 나란히 앉았다. 삼성, 현대차, SK, LG, GS, 한화, 한진, CJ 등 내로라하는 9개 그룹 총수들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 아들들이었다는 것. 1998년 5공청문회 때 삼성그룹 이건희,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나왔지만 이번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몽구 현대차회장이 출석했다.

9개 그룹 총수들은 미르ㆍK스포츠재단 기금출연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했다. 특위위원들은 이들 기업이 내놓은 자금이 순수한 기부인지, 대가를 주고받은 뇌물인지 캐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모르쇠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대가를 바라고 출연한 것이 아니다”였다. 혹은 “의사결정을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모범답안들이었다. 보나마나 전날밤 총수들은 법무팀과 함께 모의 청문회를 가졌을 것이다. “(일해재단 출연은) 위에서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냈다”(정주영 회장)라고 까발렸던 선친들과 같은 배짱 있는 답변은 없었다.

단돈 한푼이라도 자기돈이 밖으로 나갈 때는 꼼꼼히 챙겨 보기 마련이다. 수십억원의 돈을 쓰는데 총수가 몰랐다든가, 대가 없이 줬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이들 그룹이 평소 대가없이 직원의 봉급을 올려주거나 총수 몰래 하청업체의 납품비를 인상시켜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드러난 것은 정경유착의 민낯이었다. 비선실세의 재단에 갖다바친 700여억원은 어쩌면 직원들이나 하청업체에게 줘야했던 돈일 수도 있다. 이것이 최순실 국정농단의 핵심이다. 권력은 기업을 내 것 마냥 주물렀고, 기업은 권력의 비호를 받았다. 권력이 ‘삥’을 뜯었다기보다 뒷배를 봐줬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다. 21세기가 시작하고도 16년이 더 지났지만 정경유착은 그대로였다.

정경유착은 재벌특혜의 다른 이름이다. 최고권력자는 글로벌 기업의 총수를 상대하지 중소기업 사장을 만나지 않는다. 대기업 중심 경제정책이 쏟아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유독 박근혜정부에서는 ‘대기업 프렌들리’가 많았다. 각종 규제완화나 세법개정도 대기업 중심이었다. “대기업 특혜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투자할 데가 어디가 있느냐. 대기업이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했다. 알고 보니 뒤로는 검은 거래가 있었다. 권력자의 주머니를 은밀히 채워 주는 딜이었다. 그 대가로 돈없고 빽 없는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지원이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영문을 알 리 없었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한국 사회 시스템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정경유착의 악습이다. 대통령이 탄핵소추까지 된 이번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가장 좋은 기회다. 단언컨데 이번에도 그 흑역사를 정리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없다.

“지난 50년간 우리 경제와 국민들의 정치의식은 놀랄 만큼 성장했지만 정치권력과 소수 대기업 간의 정경유착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현재와 같은 권위주의적 정치,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5년마다 현재와 같은 혼란이 반복될 것이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정치권과 대기업 간의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바른 정치·경제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이 지난 13일 기자들과 가진 오찬에서 한 말이다. 매주말마다 전국 곳곳을 촛불로 덮은 국민들의 바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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