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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닉네임
운동권
등록일
2024-01-11 20:01:48
조회수
240
손학규의 운동권 증언



[ ..... 운동권 ....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 ]


06 2003 MAGAZINE


[인물연구] 孫鶴圭 경기도지사의「한국 現代史와의 화해」

『사회를 발전시키는 正義만 正義. 한국을 東北亞의 네덜란드로 만들자』



김연광

인구 1000만의 巨大 道政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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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때 시위를 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고 강원도 함백의 탄광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탄광으로 간 계기가 있습니까.


『무기 정학은 기한이 없으니까,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죠. 지도를 펴놓고 탄광지대가 어딘가 찾다가 함백으로 무작정 찾아갔어요. 「인생의 막장이라는 탄광의 막장에서 일해 보자」고 비장한 각오로 갔는데 현실을 전혀 모른 거예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어요. 막장은 보수가 제일 높아서, 나 같은 초보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이틀쯤 기다리다가 「보다 가시」라고 選炭(선탄)하고 나오는 버럭을 버리는 일을 했어요. 기술이 전혀 필요 없고, 임금이 제일 낮은 일이었어요. 산비탈에서 貨車(화차)를 휙 돌려 쏟는 일인데 잘못하면 사람까지 같이 돌아가요』


―시위에 단순히 참여한 것 하고, 「基層(기층) 민중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식을 갖게 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요. 대학 2학년 때부터 「앞으로 직업 혁명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까.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어요. 韓日회담 반대로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3학년이 되고서는 직업이 학생 운동가가 됐어요. 학교 시험을 우습게 알았고, 고시 보는 친구들, ROTC 하는 친구들을 의식이 없다고 비웃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직업 혁명가를 꿈꾸는 생활을 계속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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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면서 金芝河(시인), 金道鉉(前 문화체육부 차관), 玄勝一(한나라당 국회의원), 金正男(前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같은 문리대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의식화된 거죠. 저는 순진한 아이가 이데올로기적인 학생 운동권에 엉뚱하게 接木(접목)된 케이스예요』


「또박이」기질 때문에 학생운동 리더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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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197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적 기반도 민족주의와 反美, 사회주의라고 봐야죠.


『그렇죠. 그때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미국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였으니까. 反日 민족주의가 슬쩍 反美로 돌았어요. 거기에 反매판, 反재벌이 더해졌죠.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초년병들의 필독서가 김성두의 「재벌과 빈곤」,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였어요』


―당시 운동권이 毛澤東(모택동)의 중국과 胡志明(호지명)의 월맹에 상당히 경도됐었죠.


『1960년대 중반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左翼 역사책,이른바 「마분지 이론서」를 교본으로 했습니다. 「세계사 교정」, 「조선사 교정」, 「조선사회 사상사」를 읽었어요. 그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新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구체적인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 「큰 모순과 작은 모순이 있는데, 작은 모순은 보류해 두고 큰 모순을 주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毛의 논리에 매혹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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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는 黃晳暎씨와 의기투합해서 둘이서 구로공단에 조그마한 자취방을 얻어 놓고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어요. 그때는 기업체들이 「중학 졸업」 학력을 요구했어요. 경기중학 졸업 증명서를 가지고 취업이 되겠어요? 黃晳暎씨는 명문인 경복중학에 들어갔지만, 퇴학 맞고 제적당하고 해서 중·고등학교를 여러 군데 다녔어요. 그래서 취직이 쉽게 됐어요.

黃晳暎씨가 「너는 형편없는 학교를 나와서 취직도 못한다」고 놀렸어요. 그래서 국졸 학력만 요구하는 목공장에 취직했어요. 몇 달 다녔는데 그 회사 간부가 제 동창이었어요. 維新 후라 서슬이 퍼런 시절이었어요. 다른 직장을 찾겠다고 구로공단에서 뒹굴었죠』


그 무렵 그는 朴炯圭 목사를 만난다. 朴목사는 『노동운동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빈민선교』라면서 孫鶴圭를 기독교 사회운동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그는 權晧景(권호경·前 기독교 방송 사장), 金東完(김동완·現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 공동대표) 전도사와 함께 청계천의 판자촌으로 선교활동을 위해 들어갔다. 1973년부터 1970년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기독교 사회운동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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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0610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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