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빌린 돈을 갚지 못한 안토니오에게 “약속한대로 심장 가까운 쪽 살덩이 1파운드를 내놓으라”며 소송을 제기한다. 일종의 신체포기각서에 대한 이행 요구다. 이에 대해 법원의 판결은 이렇다. “계약대로 살덩이 1파운드를 가져가라. 다만 그걸 잘라낼 때 피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뜬금없이 ‘베니스의 상인’을 인용한 것은 계약의 사회성과 반(反)사회성을 얘기하기 위함이다. 위의 판결은 바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행위를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에 대한 경종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반사회적 내용을 담은 계약은 어떤 경우라도 무효라는 점을 현명한 판결을 통해 촌철살인(寸鐵殺人)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채업자에게 빚을 지고 이를 못 갚을 경우 ‘신체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는 설정을 간혹 보게 된다. 그런 행태의 비인간적 잔혹성과 원시적 야만성에 치를 떨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민법도 제103조에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라는 규정을 통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명확히 적고 있다.

대한전문건설신문 2018년 4월16일자 1면은 종합건설사들이 하도급업체들에게 ‘공사포기각서’를 강요하는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공사포기각서는 ‘하수급인의 사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공사 수행이 어려운 경우 공사계약상의 일체 권한을 포기하고, 공사비 등의 모든 사항은 정산이 완료된 것으로 인정함은 물론 손해배상까지 모두 책임진다’는 식으로 하도급업체에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하도급업체의 ‘사정’이라는 것에 ‘각종 민원 또는 소란, 경찰 또는 119 구조대 출동’ 등 책임소재를 떠넘기는 내용까지 담고 있어 해도 너무한다는 원성을 사고 있다. 누가 봐도 민법 103조가 정한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임이 자명하다.

하도급업체에게 있어 공사는 회사와 가족은 물론 건설근로자의 일자리와 삶, 생계를 위한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공사를 포기하라는 것은 밑에 딸린 많은 사람에게 삶의 끈을 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와는 동떨어진 범법행위가 분명하다. 잔혹성과 야만성을 담은 신체포기각서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관계당국은 부당성은 인정하지만 하도급법상 처벌할 방법이 없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각서만으로 처벌하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민법 103조의 ‘무효’ 규정을 원용하면 이런 각서가 원인무효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다. 각서는 계약서와 비교했을 때 법적 구속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법적 증거물로 충분히 이용할 수 있어 내용이 선량한 풍속을 해하거나 반사회적이면 반드시 무효화할 필요가 있다.

건설업체에게서 공사를 떼어내는 일은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 같다. 관계당국은 이런 점을 인식해 ‘살점은 도려내되 피는 흘리지 않도록 하는’ ‘베니스의 상인’ 명판결처럼 공사포기각서로 인해 피를 흘리는 하도급업체가 없도록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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