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당 최남주 선생이 1975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로부터 초청받아 왕실에서 국왕과 담화를 나누는 모습.
◇석당 최남주 선생이 1975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로부터 초청받아 왕실에서 국왕과 담화를 나누는 모습.

1926년 10월10일 신라 고도 경주의 하늘은 푸르다 못해 차라리 시렸다.

일제 식민지 치하의 신라 궁성인 반월성 옛터 풀빛은 애잔했다. 찬란한 신라 황금보관이 출토된 금관총으로부터 약 100m 떨어진 곳. 키가 큰 미남의 중년 서양 신사 내외와 수행원으로 보이는 5~6명의 서양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중절모를 쓴 동양인들도 모여 있었다. 이윽고 서양 중년 신사는 발굴작업 중인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는 작은 삽으로 잠시 땅을 파는가 싶더니 이내 능숙한 동작으로 어떤 물체 하나를 출토시켰다.

순간 비취색보다 더 푸른 하늘에 작열하는 태양은 1500년 동안 땅속 깊숙이 고이 잠들어있던 신라 황금보관을 영롱하게 비추었다.

금관 정수리에 조각된 3마리의 봉황이 마치 비상이라도 할 듯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양 중년 신사와 그 부인은 신라 황금보관이 발굴되는 순간 종교와 국적을 초월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두 손을 합장하며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서봉총 신라 금관을 발굴한 영예의 주인공은 바로 스웨덴의 황태자이면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공과 황태자비인 루이스 비 부부였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에 의해 발굴된 서봉총 신라금관은 동아시아 고고학계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발굴 현장에 조선인 청년 고고학도로서 유일하게 참가한 인물이 바로 필자의 선친인 석당 최남주(1905∼1980)다. 구스타프 황태자와 석당의 아름다운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석당은 당시 일본의 잔혹한 통치 속에 마구잡이로 진행되는 문화재 찬탈과 파괴를 막고자 청춘을 바치고 있었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이러한 식민지 청년 고고학도인 석당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구스타프 황태자와 석당과의 영어 통역은 고종황제 전속 통역사이자 전 국회의원 고흥길 의원의 조부인 고영일 선생이 담당했다.

구스타프 황태자 일행은 앞서 그날 새벽 토함산 석굴암에서 동해 일출을 감상하고 신라 석조건축예술의 정수인 석굴암을 참배했다. 석굴암 본존불의 인자한 미소를 보고 그리스 조각보다 훌륭하다는 찬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어 불국사의 아름다운 건축미와 석가탑, 다보탑의 예술적·종교적 경지에 거듭 감탄했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1950년 67세의 나이에 국왕에 즉위했는데 그해 마침 발발한 한국동란에 의료단과 병원선을 즉각 파견하는 등 적극적 지원에 나섰다.

서봉총 금관을 발굴한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도움을 준 것이다. 1962년 석당은 한국·스웨덴 협회를 창설해 양국 간 문화교류에 크게 공헌했고, 1971년 스웨덴 최고훈장인 바자훈장 기사장을 수훈했다.

석당은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신라 금관이 발굴됐다는 소식을 구스타프 국왕에게 전했고, 국왕은 자신이 발굴한 평생 잊지 못할 서봉총 금관이 보고 싶다고 회신한 후 석당을 스웨덴 왕실로 초청했다. 그러나 90세의 고령이던 국왕이 갑자기 서거하는 바람에 생전 재회는 성사되지 못했다.

1975년 할아버지를 이어 즉위한 칼 구스타프 16세 국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1975년 석당을 스웨덴 왕실로 초청했다. 이후 칼 구스타프 국왕과 석당가 2세들과의 교류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4년 칼 구스타프 국왕은 석당의 아들이자 고고학자인 최정필 교수(현 한국박물관문화재단 이사장)의 안내로 경주를 방문했다. 서봉총 옛터에서 그는 신라 문화가 맺어준 스웨덴 왕실과 석당 최남주가와의 2대에 걸친 아름다운 인연을 회상했다.

그는 2010년 최정필·최정대(코리아타임즈 칼럼리스트) 형제에게 한·스웨덴 문화교류에 힘쓴 공로로 북극성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찬란한 신라 문화와 건축미의 향기는 암담한 역사의 비극과 시공을 초월해 오늘날까지 한·스웨덴 양국의 우호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저작권자 © 대한전문건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