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은 그나마 바다를 보는게 낙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어렵게 됐어요”

몇 해 전 만난 부산의 한 구청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내 고향 부산은 산복도로의 도시다. 평지가 부족한 항구도시인 탓에 서민들은 산꼭대기로 밀려 올라갔다. 여름이면 뙤약볕이 내리쬐고, 겨울이면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밀어닥치는 곳이지만, 그래도 저멀리 탁트인 바다조망은 황제 못지 않은 호사를 누리는 것이라며 자위를 하곤했다. 그런 부산의 산복도로에서 바다풍경이 사라진 것은 산 아래서 지어진 초대형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불쑥 치솟으면서다. 부산은 5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이 가장 많은 도시다. 전국에서 두번째로 높은 101층짜리 엘시티를 비롯 초고층 건축물은 35개동이나 된다. 전국 114개 초고층 빌딩 3개 중 1개가 부산에 있는 셈이다. 해운대구의 초고층빌딩은 강남구보다 3배나 많다. 

부산에 초고층 빌딩이 많은 이유는 바다경관 때문이라고 한다. 건설사들은 해안가 가까운 곳에 고층 빌딩을 지었고, 바다경관을 독점했다. 뒤늦게 지어지는 건물들은 해안가에서 멀어질수록 더 높이 올려야 했다. 바다 경관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물의 가치는 키높이 경쟁을 부추겼다. 지구단위계획은 함부로 변경됐고, 높이제한 규정은 무용지물이 됐다. 특혜 시비도 벌어졌다. 

당연히 교통난은 심해졌다. 가뜩이나 좋지 못한 도로환경에 고층빌딩 인근은 평일 대낮에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는다. 부산인구는 매년 줄고 있지만, 주요지역의 교통난이 좀처럼 완화되지 않는 것은 인구가 일부지역에 몰려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반면 구도심은 빈집으로 넘쳐나면서 주말저녁에도 황량했다. 초고층 건물들은 도시의 양극화를 촉진시켰다.

정부가 일산, 분당, 평촌, 산본, 중동 등 1기 신도시에 대한 건축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내용의 ‘노후계획도시 특별법’을 공개했다. 안전진단은 면제하고, 용적률은 최대 500%까지 높이겠다고 했다. 빨리 공사에 들어갈 수 있게 하고, 더 많은 집을 지어 경제성을 높여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리모델링할 때도 가구 수를 20%까지 더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지역에도 30층 이상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설 수 있다. 1기 신도시뿐 아니다. 정부는 20년이상 100만㎡ 이상 되는 택지는 똑같은 혜택을 주기로 했다. 서울 개포, 고덕, 상계, 중계,목동, 수원 영통, 인천 구월 등 수도권 내 주요 지역에서도 지금보다 더 높이, 더 많은 가구수가 있는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사업성은 높아지겠지만, 도시경관은 나빠지고 주거의 질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 발표를 보면서 부산이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다. 스카이라인이 상당히 훼손된 부산이 이들의 미래가 될 수 있다. 35층룰이 사실상 무너진 서울에는 한강변 고층건물이 속속 들어설 예정이다. 압구정, 여의도, 이촌 등에는 최고 70층짜리 재건축 설계안이 준비 중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재건축 규제 완화 방안은 고층건물 경쟁에 불을 당길 수 있다. 고층건물 거주자들은 좋은 경관을 누리겠지만, 아래에 사는 단독주택이나 빌라 거주민은 점점 더 하늘을 보기 힘들어진다. 인구감소 시대를 맞아 도시양극화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둔촌주공 재건축 아파트(올림픽파크포레온)가 분양에 들어가자 인근 고덕의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새 아파트가 흥행에 성공하면 주변 아파트 집값이 오르던 것과 다른 양상이다. 

지방소멸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수도권이라고 언제까지나 인구가 유입될 수는 없다. 재건축 거주자들의 숙원을 풀어주기 위해 제정되는 노후계획도시 특별법은 또 다른 숙제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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