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다. 요새 ‘노조’와 ‘조폭’이란 말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합성어 ‘노폭’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우스개다. 노조와 조폭 누가 더 강할까? 노조다. 명분이 따르기 때문이다. 노조는 영어로 ‘유니언(union)’인데 ‘합집합’이란 뜻도 된다. 그래서 세를 불리기가 쉽다. 몇십만 명을 모을 수 있다. 사람들이 모이면 권력이 생긴다. 한자어 ‘권력’을 한글로 풀면 ‘주먹 힘’이다. 법이 없으면 주먹이 곧 힘이다. 법이 있어도 때로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원시사회와는 달리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주먹이 아니라 머릿수로부터 나온다. 노동자는 약하지만 노조는 강하다. 노조가 곧 권력이다.

그 권력의 원천은 교섭력이다. 노조의 본래 목적은 부당해고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론적으로 시장 내 마찰이 없다면 해고는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해고되면 ‘순간이동’을 통해 즉각 재취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가 해고를 당하면 재취업하기까지 비용과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노동자는 해고가 두렵다. 반면 기업은 시장선택이 두렵다. 그렇기에 노동자는 교섭력을, 기업은 비용 극소화를 추구한다. 서로 생각도 다르다. 한쪽은 임금을 더 받고 싶고 다른 한쪽은 덜 주고 싶다.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만큼 주고받는 것이 맞다. 그것이 공정이다. 공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을 두고 한국 사회의 대처방식은 과학적이지 않다. 대개 노사 양측에 도덕심을 호소한다. 과학적인 방법은 양쪽 교섭력이 평형을 이루도록 제도설계를 하면 된다. ‘불공정’은 이해관계가 다른 두 집단 간에 교섭력 차이가 현격할 때 발생한다. 교섭력이 평형해지면 모든 것이 자동조정된다. 그 결과 저절로 ‘공정’해진다. 공정은 도덕심이 아니라 자동조정 메커니즘을 통해 실현된다. 노동조합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노조는 교섭력 평형을 위해 존재한다. 

한국의 노조 교섭력은 거대하다. 거대 교섭력은 정치편향 원인이자 결과이다. 정치편향을 통해 교섭력이 거대해지고, 거대 교섭력을 통해 편향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조가 특정 정당 입맛에 맞게 정치구호를 외치면 정치편향이자 편향정치이다. ‘한미관계’ ‘남북관계’ 등 외교적 사안을 놓고 나서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노조가 할 일은 정치가 아니다. 노조는 직업 간 차별만 보고 직업 내 차별은 못 본 체한다. 바로 노조원이 비노조원을 차별하는 경우다. 노조원 일자리를 위해 비노조원 일자리를 빼앗으면 그건 ‘갑질’이다. 심지어 불로소득을 챙기는 노조원들도 있다고 한다. 정상적인 나라에서 불로소득을 챙기면 불한당이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노동자들 대부분은 오늘도 생업 현장에서 그 원리를 실천하고 있다.

한술 더 떴다. 노조 간부의 수뢰 녹취록이 나오고 조합비 유용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노조의 대응방식을 보면 없던 의심이 생긴다. 회계장부 공개를 거부해서다. 자본주의 나라에선 자기가 번 돈을 자기가 쓴다. 자유다. 그 용처를 물을 필요가 없다. 정부 보조금을 받은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그건 세금이다. 세금을 낸 사람들은 그 용처를 물을 권리가 있고, 세금을 쓴 사람들은 그 용처를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세금은 ‘공돈’이기 때문이다. 공돈은 특징이 있다. 쓰는 사람이 그 돈을 직접 벌지 않는다. 그 경우 돈을 마구 쓸 유인이 발생한다. 적자운영을 좋아하는 기업은 단 한 곳도 없다. 자본주의는 간단하다. 자유롭게 벌어 자유롭게 쓴다. 단 세금을 내고 안 내고는 자유가 아니다. 싫어도 세금을 내야 하듯 싫어도 회계장부를 공개해야 맞다.

노조를 망가트리는 것은 ‘약자’ 프레이밍(framing)이다. 행태경제학에선 프레이밍이 합리적 선택을 방해한다고 한다. 그 프레이밍 효과 때문에 누군가가 노조의 잘못을 지적하면 약자 탄압으로 몰린다. 언급한 대로 노조는 권력이다. ‘갑’이다. 노조에 맞서는 이가 ‘을’이다. ‘교섭 기득권’ 노조도 이젠 발전전략이 필요하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노동력은 상이성이 존재한다. 성실한 노동자들과 불성실한 노동자들이 뒤섞여 있다는 뜻이다. 근면한 노동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이는 가장 옆에서 놀고먹는 태만한 노동자이다. 누군가의 태업은 전체 사기를 떨어트린다. 근로의욕을 위해서라도 자체적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노조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조가 지킬 것은 성실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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