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팝이라는 대중음악 장르가 있다. 일본 음악계가 장르화했다. 거품 경제가 절정이던 1980년대 초에 유행의 첨단 자리를 차지했다. 대중음악 장르의 기원을 찾는 일은 미련스럽긴 하다. 그럼에도 구태여 시티팝의 원조를 찾아가면 도시 레저와 관련된 음악을 만나게 된다. 강이나 바다 위 요트에서 즐기는 삶을 노래한 음악과 연이 닿는다. 그런 연유로 시티팝은 도시에서의 삶에서 찾는 작은 기쁨, 관계, 만남 등을 담고 있다. 당연하게도 도시의 직장에서 일을 마친 후의 밤, 유희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도시 안에서 풍요와 안락함을 느끼는 대중이 즐겼던 음악이었다. 도시의 삶이 지겹지 않고, 살아볼 만한 시절 시티팝은 그 기세를 떨쳤다.

시티팝은 한국도 비껴가진 않았다. 1990년대 들어 도시의 밤, 그 안에서의 만남과 이별, 작지만 사랑스런 토닥거림 등을 담은 가요가 유행했다. 도시 이면의 어둠을 노래한 힙합 등과는 달리 도시를 배격하진 않았다. 도시 안에서 가끔 투정도 부리지만 딱히 엄청난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도시를 마주하더라도 도시는 일상을 사는 도시민에게 직접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도시의 삶 안으로 큰 무게를 갖고 후벼 파지 않는 음악이었다. <샴프의 요정> <달의 몰락>이나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과 같은 전형적 시티팝은 삶의 심각함보다는 약간의 들뜸과 투정이 섞여 있는 긍정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IMF 통치 경제 시대와 신자유주의 시간을 맞고, 이어 외환위기의 시간을 지나면서 도시에 대한 태도는 바뀌기 시작한다. 도시는 어느덧 황량한 느낌을 자아내는 공간으로 바뀐다. 한참 시간이 더 지나 팬데믹 기간이 되면서 도시는 거의 잿빛에 가까워진다. 시티팝이 자취를 감추는 일은 당연지사였다. 도시를 화제에 올리면 아파트 시세나 구도심의 소멸, 도시의 불균등 발전 의제로 이어지는 터에 긍정성은 부정성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런 가운데 시티팝이 온전히 자리에 버티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시를 마주하기보다는 피하게 되는 시간을 맞으면서 한때 풍요로움의 상징 같던 그 장르는 스러져갔다. 시티팝은 풍요로움의 아이콘 역할을 해냈다. X세대가 제멋대로 살고, 오렌지족이 도시를 누비고 다닐 때의 모습과 병렬돼 소개되곤 했다. 그 추억의 시티팝이 최근 현실이 돼 음악팬들 곁으로 왔다는 보도가 빈번하다. 레트로(복고) 감성이라며 쉽게 던지는 해설을 만나기도 한다. 큰 설득력은 없다. 도시의 삶에서 불거진 사회 문제들이 미제인 상태로 남아 있는데 도시의 안락함을 노래하고 있으니 좀 더 친절한 해석을 붙여줘야 할 것 같다. 도시를 마주하며 시티팝을 즐기려 하기엔 도시 문제가 너무 무겁다. 지금 당면한 도시 문제들은 추억으로라도 즐기기엔 부담스럽다. 그런데도 풍요의 시간을 갖지 못했던 밀레니엄 세대가 시티팝 유행의 엔진이 되는 이 일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저런 방편을 다 동원했지만 도시의 현실을 극복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탓인지 엉뚱한 해결책이 불쑥 머리를 들이민다. 김포에서 겪는 교통지옥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어렵자 과감한 상상을 던져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유혹한다. 서울의 이름표를 달아 상상 속에서 고통스런 현실이 해소되는 순간을 맞이하자는 해결책을 던진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일이 일순간에 해결되는 듯한 상상이 해결책의 자리를 차지한다. 시티팝이 노래하던 도시와 시민의 만남 순간을 경험하진 못했지만, 그때의 기분, 스타일, 느낌을 통해 도시를 상상하려는 노력 아닐까. 도시를 마주하진 않되 상상하는 일. 그것이 시티팝을 다시 찾고 노래하는 이유 같아 보인다. 경험하지 않았지만 추억이 된 스타일을 찾는 실천을 하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살아간다.

90년대 시티팝은 도시를 마주하며 부르던 노래였다면 2020년대 지금 부르는 시티팝은 도시를 상상하는 음악적 실천이다. 도시를 피하며 도시를 노래하는 상상 실천이다. 그냥 레트로가 아니라 회피적, 보수적, 쫄아든 일상이다. 풍요로움에서 비켜 간 세대가 풍요로웠던 과거를 노스탤지어로 갖고 있음은 ‘웃픈’ 일에 가깝다. 도시를 상상하는 대신 실질적으로 마주하게 하고, 그 안에서 도시 문제를 만나며 살아가는 시민이 되도록 돕는 일이 절실한 때다. 도시 공간 안에서 긍정성을 갖게 유도하고, 안도감과 풍요의 느낌을 갖도록 서비스하는 도시 정책과 분위기 고조가 요청된다. 시티팝이 상상의 노래가 아닌 제 몸으로 겪은 내용을 담은 음악이 되도록 돕는 온갖 도시 노력이 필요한 때다. 그런 점에서 시티팝의 재유행은 도시 관여 정책가, 활동가, 입안가들에게 던져진 큰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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