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뉴스는 갑과 을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갑의 횡포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얘기에, 누가 보아도 다 알고 있었을 듯한 탐욕스런 기업들의 얘기로 연일 세상이 시끄럽다. 그런 내용의 뉴스를 보면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지만, 순간 순간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생각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노예(노동자)가 자발적인 복종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관계가 완성되지만, 그 속에 결코 쉽게 간과하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부조리들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헤겔은 ‘인정’이라는 관계를 통해 노예가 주인을 딛고 진짜 주인이 되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헤겔의 이야기일 뿐, 이 시대에 사는 대부분이 ‘경쟁’ 즉 싸움에서 진 사람들은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제도에서의 ‘갑’과 ‘을’은 점점 더 어려운 위기관계로 빠져들게 된다.

이제 되돌아가, 지난번 기고된 내용의 끝에서 지적한 바 있는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나쁜 경쟁의 시작은 이미 ‘을’이 인정하지 않는 시험성적과 대학진학, 그 경쟁에서 기인하고 있는 듯하다

다수에게 기회를 주는 교육민주주의는  다수가 일정하게 경쟁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과연 그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요즘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들다’는 말은 단적으로 교육이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위상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을 비판하는 거라고 여겨진다. 최근 일부 정치권에서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킨 바 있는 반값 등록금과 등록금인하 문제는 왠지 모르게 현실에 대한 고민없는 포퓰리즘이 맞다고 본다.

취업문제를 살펴보지도 않은 채 대학진학률을 전제로 한 등록금 인하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본다. 물론 높은 교육비 부담이 지속되는 한, 개인과 가정은 그 비용을 스스로 감당하기 위하여 소득을 높여야 하는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단지 등록금 인하는 대학진학률을 낮추는 일과 연동해서 추진해야만 그 본질적인 접근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선진국들보다 더 높은 대학진학률은 결국 등록금 인하로 인하여, 단순하고 교묘하게 포장된 다수에게 수여되는 교육기회는 더욱 심화될 것이고, 이로인한 취업문제는 출발에서 갇힌 고민으로 남겨두게 될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진다.

지금의 현상처럼 ‘갑’과 ‘을’을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류층과 서민층, 대졸자와 고졸자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관점의 언론보도는 나쁜경쟁을 알게 모르게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히 경계하여야 한다.

비록 헤겔의 이야기지만, 노예가 주인을 딛고 주인이 되어가는 이상을 꿈꾸어야만 얄궂게도 억울함과 비참함에 주눅드는 ‘을’을 남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덜 공부하고 덜 노동하는 삶을 인정하자.

내가 주류로 살지 않아도 억울하지 않고 비참함을 느끼지 않는 삶. 그 삶들이 인정 받을 때 우리 사회의 공정한 경쟁은 시작된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김용상 코스카 중앙회 기획관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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