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는 18세기 후반 트럼프놀이광인 영국의 J.M 샌드위치 백작이 식사하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고안해 낸것이라고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J.M 샌드위치 백작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었다면 아마 누구보다도 먼저 비빔밥을 개발(?)하여 비빔밥 판서 정도가 되지않았을까 우스게 상상도 해본다.

아무튼 이렇게 개발된 샌드위치가 요즘은 양쪽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를 비유해 샌드위치신세라고도 하고 일인시위자의 형상이 마치 샌드위치같아 샌드위치맨이라고도 불리우는 등 여러모로 사용되어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런데 나는 어릴 적에 이 샌드위치에 관한 남다른 경험을 갖고 있다.
우리집은 위로 남자형제 세 명에 막내 여동생 이렇게 3남1녀인데 내가 차남으로 남자형제 가운데 즉 샌드위치로 태어났었다.

소도시에서 태어나 생활하다 교사이신 아버지의 귀향으로 시골할머니댁으로 이사를 하다 보니 집이 좁아 형제들끼리는 한 방을 써야 했고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로 부딪히기가 일쑤고 철이 없어 종종 싸우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럴 때 마다 샌드위치 신세인 나는 항상 할머니로부터 꾸중을 들어야 했다.
형과 싸우면 동생이 형한테 대든다고 꾸지람, 동생과 싸우면 형이 동생보다 못하다고 꾸중…. 그럴 때마다 어린마음에 늘 섭섭함이 있어왔는데 동생과 싸우고 할머니로부터 꾸중을 들은 어느 날… 그날은 기필코 할머니의 부당한 처우에 항거하여 할머니의 편애에 대한 나의 억울함을 무언의 행동으로 호소할 요량에 작은방 장롱 속 높게 쌓아놓은 이불 위에 들어가 누워서 숨어 버렸다.

그 당시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해가 지면 온동네가 암흑이라 해가 떨어지면 밖에서 놀던 애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해가 졌는데도 내가 집안에 보이지 않자 나를 찾는다고 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장롱안까지 들렸다.

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내심 나의 존재감을 알아준 데 대한 만족감이 오버랩되면서 조금만 더있다가 나가야지 했었는데 포근한 이불과 다소 좁지만 나에게만 주어진 작은 공간이 너무 평온했던 것일까? 갑자기 내몸이 공중에 붕하고 뜨는 느낌과 동시에 쿵하고 내 키보다도 더높은 이불위에서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만 그사이 장롱속에서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추석이라 고향집에 몇일 편히 쉬며 옛날 장롱이 그대로 있는 그방에서 묵다보니 어린시절의 철없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문득 위로는 원수급자인 종합건설업체, 아래로는 건설기계대여업자와 건설근로자?. 지금 우리 전문건설업계도 샌드위치 아들 꼴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디 우리 4만여 전문건설업체들이 숨을 수 있는 장롱은 없나?    /박영기 코스카 경남도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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