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제시장에서 구두닦던 덕수와 달구에게 구두를 닦던 한 젊은 신사가 신문 한 조각을 보여주며 말한다. “외국에서 돈 빌려와 이 땅에서 조선소를 지을 꺼야.”

코흘리개 어린꼬마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 이상한 손님에게 묻는다. “마른 땅에서 어떻게 배를 만들어요?” 그러자 이 청년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며 답한다. “우리나라에서 넓은 땅을 산 뒤 그 사진을 외국인에게 보여주는 거야. 당신이 필요한 큰배를 여기서 만들어주겠다고 한 다음, 배를 만들어서 파는 거지.”

그가 자리를 뜨자 덕수와 달구는 쑥덕댄다. “미친 것 아냐, 어떻게 배를 만들어? 아예 국산 자동차를 만든다고 하지.” 트럭에 올라탄 청년 사업가는 아이들에게 손을 크게 흔들며 인사를 하는데, 멀어져가는 트럭 뒤켠에는 ‘현대건설(現代建設)’ 네 글자가 찍혀 있다. 그는 청년 정주영이었다.

800만 명이 본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건설에 대한 오마쥬(경의, 찬사)를 이렇게 담았다. <국제시장>은 6·25전쟁의 함흥철수부터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 베트남전쟁까지 굵직한 한국현대사를 한 개인의 가족사로 묶은 영화다. 한국현대사를 말하면서 건설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건설인들은 1970~80년대 한국경제를 개척했던 주역들이었다.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각종 교량과 건물, 공장을 맨손으로 지었다. 새로 조성된 산업단지에서는 공산품이 쏟아져 나왔고, 제품들은 도로를 통해 항만으로 달려나갔다. 한국건설의 힘은 1980년대 중동으로 이어졌다.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불린 리비아 대수로공사는 사막의 모래바람도 잠재웠다. 1970~80년대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이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는 재원이 됐다.

한국경제를 주도했던 건설업에 위기가 닥친 것은 외환위기 때다. 많은 부채를 떠안고 있던 건설사들은 흑자부도를 내며 잇달아 쓰러졌다. 부동산붐이 잠시 이는가 했지만 곧 버블이 터졌고, 또다시 깊은 침체다.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 이후 건설업계에 불어닥친 불황은 재앙에 가깝다. 도급순위 상위 기업이 픽픽 쓰러졌다. 4대강 사업은 각종 비리와 담합에 얼룩지면서 건설업계를 신뢰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건설업계 누구를 만나도 “어렵다”는 하소연밖에 없다. 건설업은 이제 미운오리새끼로 전락했을까.

이럴 때 만난 <국제시장>속 건설인 정주영은 반가웠다. 돈은 물론이고 기술도 없던 때, 지금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덜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무것도 없던 건설인들은 열정 하나로 세상을 바꿔 나갔다. 어디 현대건설뿐이었나. 동아건설, 대우건설, 대림산업, 극동건설, 삼부토건 등 건설기업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리고 이름 없던 수많은 전문건설인들은 실제 현장을 누빈 진짜 주역이었다.

건설업계가 최악의 경영상태라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진 않다. 지난해 우리 업체들은 660억 달러어치를 수주했다. 2010년에 세웠던 716억 달러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역대 2위 수준은 된다. 총 455개사가 99개국에서 708건의 공사를 따냈다.

이라크, 리비아 사태 등 악재가 끊이질 않았지만 중동에서 300억 달러가 넘는 물량을 확보했다. 아프리카·유럽과 중남미에서는 역대 최고액을 수주했다. 한때 저가수주로 해외물량을 무리하게 따내면서 경영상태가 악화되는 위기도 겪었지만 지난해 한국업체들이 따낸 상당수 물량은 ‘제값’을 받는다고 한다.

2015년 청양의 해에는 건설인들이 자신감을 되찾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머니에 돈이 팍팍 쌓인다면 가장 좋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긍지와 자부심만큼은 되살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무에서 유를 일궜던 우리 건설인들의 저력을 믿는다.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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