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직접 체험한 32년 만의 폭설과 한파는 끔찍했다. 말로만 듣던 눈보라 ‘블리자드’가 그렇겠다 싶었다. 태풍 버금가는 초속 26m의 강풍이 소낙눈을 등에 업고 휘날리면서 제주시 전역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윈드쉬어(바람의 방향이 자주 바뀌는 난기류)경보, 강풍경보, 저시정경보, 대설경보가 한꺼번에 제주공항에 내려졌다. 기온마저 역대 4번째인 영하 6.1도까지 떨어지면서 도로도 꽁꽁 얼어붙었다. 하늘길과 뱃길은 지난달 24일 오전부터 끊겼다. 제주시 외도 일부 지역은 한때 정전까지 되면서 시민들이 추위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원채 눈보라가 심해 100m 떨어진 식당에 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자동차로 10분이면 충분한 길이 1시간이 걸렸다. 더 당황한 것은 제주도 사람들이었다. “살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산간지방은 눈이 잦지만 해안지역은 좀처럼 눈쌓이는 경우가 없는 제주다. 별다른 제설도구가 없었던 제주시내는 삽시간에 눈에 묻혔다. 택시는 물론 버스도 한때 중단됐다. 체인마저 동이나 상당수의 차들이 움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깊었던 것이 제주도민과 관광객들의 대처였다. 공항에 수천 명이 몰린 것 치고는 도드라지는 과한 충돌이나 소란은 없었다. 당황한 항공사들이 우왕좌왕하다가 승객들의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갑작스런 사태를 감안하면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곧 자원봉사자 옷을 입은 제주사람들이 공항으로 나와 간단한 먹을거리와 음료, 메트리스 등을 나눠줬다. 제주지역 병원으로 구성된 공항 의료지원반은 공항 내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 의료활동을 벌였다.

급하게 숙소를 구해야 했던 관광객들이 호텔 등 각종 숙박시설로 몰려들었지만, 호텔은 차분하게 대응했다. 바가지를 씌웠다는 일부 보도도 있었지만 정상가격을 받은 숙소가 더 많아 보였다. 오히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무료잠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사람들이 잇달았다.

사재기도 없었다. 갑작스런 정전으로 불이나간 식당에서도 “그럴 수 있지 뭐”라며 느긋한 식사를 즐기는 제주사람이었다. “섬사람은 뭍사람보다 느긋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침착함과 여유였다.

제주에서 발묶인 3박4일은 역설적이게도 한층 높아진 우리의 시민의식을 엿보는 기회였다. 최고 9만명의 발이 묶였지만 기록할 만한 대형사고는 없었다.

한라산에서 많은 등산객이 고립됐을 것으로 우려됐지만 인명사고도 보고되지 않았다. 일단 비행이 재개되자 정부와 항공사는 비교적 신속하게 움직였다. 이틀 밤을 새고, 발권을 5~6시간씩 기다린 승객들도 자제심을 보였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제주공항이 조금더 빨리 대응했더라면 대란을 줄일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항공기를 탔던 상당수 승객들은 영문도 모른채 비행기 안에서 6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제설작업이 빠르고 신속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일각에서는 김석기 전 사장의 총선출마로 공석이 된 공항공사의 한계가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대설을 제대로 예보하지 못했던 기상청도 아쉬움이 있다. 국토교통부도 첫날은 우왕좌왕했다.

그럼에도 32년 만의 폭설과 한파라는 것을 감안하면 비교적 잘대처했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재난대응 시스템으로는 나쁘지 않았다는 얘기다.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잦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터진뒤 대처하는 자세다. 그런 점에서 제주폭설은 제법 괜찮은 사례로 남을 것 같다.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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