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앞두고 배낭여행 간 아들 스위스에서 열차 사고로 잃고 신학대학원생된 63세 김학영씨
“아들과 함께하는 졸업입니다”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가슴에 묻고 거듭난 삶을 살고 있는 늦깎이 목회자 후보생이 있다. 김학영씨(63 ․경기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는 오는 2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다.

김씨는 “아들또래의 학생들과 기숙사에서 생활한 지난 3년 동안 나는 아들과 같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하루 행복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원래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아내와 남매가 교회에 같이 가자고 해도 딴청을 부려 가정에서 외톨이로 왕따 당하기 일쑤였던 그가 인생황혼기에 신학대학원생이 된 것은 아들 김 찬군(당시 26세)을 먼저 떠나보내고 인간으로써 견디기 힘든 엄청난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2003년 6월17일 여느 날과 같이 동네 서예학원에서 붓글씨를 쓰다가 외교통상부 직원의 전화를 받고 망연자실했다. “차마 무슨 말씀부터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보내온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아드님이 6월16일 새벽 5시30분 스위스 리스탈역에서 열차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숨졌습니다”

“찬아! 여기가 네가 오고 싶어 하던 곳이다” 김학영씨가 융프라우 봉에 올라 아들의 여권사진을 펼쳐 들고 만년설에 뒤덮인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김씨의 하나뿐인 아들 찬이는 한동대 졸업 후 병역특례업체 근무를 마치고 대기업 경력사원 공채시험에 합격, 첫 출근을 한달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 직접 보고 오겠습니다.’며 배낭여행을 떠난 녀석이 죽었다니…” 찬이는 사고 전날 밤 융프라우 봉을 오르기 위해 파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스위스 취리히로 가던 중이었다. 동승했던 홍콩인 여행객에 따르면 찬이는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배낭끈이 열차 문에 끼어 100여 미터 매달려가다 두 다리가 절단된 채 플랫폼에 내동댕이쳐졌다. 김씨는 입사 첫날 입히려고 맞춰뒀던 아들의 양복을 챙겨 처남과 함께 스위스로 날아갔다.

김씨는 “리스탈역에 1분 늦게 도착한 열차가 너무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사고가 순식간에 일어났으며, 찬이는 헬리콥터로 후송 중에도 의식이 있었으나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었다”는 현지 경찰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현지 교회에서 입관예배를 드리고 시신을 화장한 뒤 정신을 차려 아들이 가고 싶어 했던 융프라우 봉을 올랐다. 만년설에 뒤덮인 기슭에서 그는 아들의 여권을 펼쳐들고 “보아라. 찬아, 여기가 네가 그렇게 와보고 싶어 했던 곳이다”라며 하늘을 보고 또 보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귀국 후 찬이의 모교인 한동대 순교동산에 아들의 유해를 뿌렸다. 그리고 스위스 정부가 지급한 1차 보상금 2억2000만 원을 ‘김 찬 장학금’으로 한동대에 기탁했다.
 
김씨는 아들이 남긴 인터넷 홈페이지(www.chan.pe.kr)에 6년 동안 매일 일기를 쓰면서 아들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04년에는 비보를 접하고 스위스로 출국, 시신을 수습한 뒤 유골함을 안고 돌아오기까지 7일간의 여정을 글로 써서 《아름다운 동행》(두란노서원)이란 책도 발간했다. 이 책의 수익금도 한동대 ‘김 찬 장학금’에 적립되고 있다.

김씨는 “퇴직 후 나름대로 노후를 생각하느라 임신한 아내에게 칼국수 한 그릇도, 아이들에게 새 옷 한 벌도 사주지 않은 인색한 아버지였습니다”고 후회했다.
그는 “아들을 잃고 나서 가치관이 바뀌었고 진정한 삶을 깨닫고 싶어 2007년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두란노아버지학교를 수료한 뒤 스태프로도 봉사하고 있는 김씨는 “이 시대 많은 아버지들이 나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김씨는 “믿음이 깊었던 아들이 나의 졸업을 가장 기뻐할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의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식날, 그의 아들 찬이와의 ‘아름다운 동행’은 한 단계 차원을 높여 다시 시작될 것이다.
 /설희관<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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