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혹한기에 76일간 태백산맥 최초종주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등정 여성 1호

지리산 기슭서 된장담그며 소박한 삶

20년만에 아들과 백두대간 다시밟아




여성 산악인 남난희씨(53)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경남 하동군 화개행 버스를 타고 가는 4시간30분 동안 필자는 산행길에 접어든 느낌이었다. 한 개인이 큰 산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는 것이었다. 남씨는 운전석 뒤쪽을 짐칸으로 개조한 16년된 갤로퍼 승합차를 타고 마중나왔다.

고로쇠물통 등을 싣고, 땔감용 나무를 해서 실어 날라야 하기 때문에 뒷좌석을 없앤 것이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남씨는 6남매의 둘째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도봉산을 자주 오르면서 산에 매료됐다.

1981년 한국등산학교에서 암벽등반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산사람이 되었다. 대간(大幹)이란 용어자체가 생소했던 시절, 27세의 처녀가 태백산맥을 최초로 단독종주했다. 1984년 1월1일 부산 금정산을 출발, 해발 1,000m넘는 산봉우리를 50여 개나 넘으면서 76일간 강원도 고성 진부령까지 걸으며 혹한과 죽음의 공포와 싸워 이긴 것이다.

요즘의 산줄기로 설명하면 금정산에서 낙동정맥을 타고 오르다가 태백산에서 백두대간과 합류해 진부령까지 종주한 것이다. 후배 산악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약속한 지점에서 10차례 양식과 필요한 장비 등을 지원했다. 종주한 거리는 지도상으로 590㎞지만 실제로는 800㎞에 달해 2,000리가 넘는다. 남씨는 “길을 잃고 가슴까지 쌓인 눈 속에 파묻혀 울기도 했으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고 회상했다.

1986년에는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7,455m)을 등정한 세계최초의 여성이 됐다. 1989년 겨울 금녀의 벽으로 불리던 설악산 토왕성 빙벽폭포를 두 차례나 올랐고 이듬해에는 백두대간을 다시 종주했다.

산밖에 모르던 남씨에게 1994년 백두대간을 왕복종주한 지리산 청학동 댕기머리 총각이 나타나 자연스럽게 사귀다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서울생활을 마감하고 청학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으나 2년6개월 만에 이혼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남편은 얼마 후 스님이 됐으며 남씨는 청학동에서 아들을 키우며 <백두대간>이란 찻집을 6년간 운영했다.

2000년 6월부터는 강원도 정선자연학교 교장으로 열심히 일했지만 2년여 뒤 몰아친 태풍 루사로 모든 것을 잃고 지리산 기슭인 하동군 화개면 남향받이 흙집에 정착했다. 집에서 왕복 3시간 걸리는 불일폭포 인근의 쌍계사 불임암에서 매일 새벽 백팔배를 올리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남씨는 “불자는 아니지만 절하는 순간 영혼이 맑아져 16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며 “얼마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단했지만 언젠가 다시 백팔배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봄이면 차밭에서 찻잎을 직접 따서 녹차를 만들고, 집 주변에 지천인 나물과 죽순으로 장아찌도 담근다. 남씨는 특히 된장 담그기에 정성을 기울인다. 해마다 12월초면 강원도산 콩으로 메주를 쑤어 띄워놓았다가 음력 정월보름 지나 첫 번째 말(馬)날 장을 담근다. ‘남난희 표’로 알려진 된장은 단골고객이 많은 편이지만 1년에 콩 10가마니 이상은 만들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에는 남원 실상사 대안학교를 졸업한 아들 기범군(17)과 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60일간 백두대간을 종주했다. 남씨는 20년만에 다시 걸은 그 산길에서의 감회와 아들과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어 곧 출간할 예정이다.

기범군은 지난해 연말 1년 예정으로 네팔로 출국,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스님 밑에서 공부하면서 일을 돕고 있다. 남씨는 2009년 5월부터 문화예술인들이 문을 연 ‘지리산학교’에서 숲길걷기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도 숲길걷기반 회원들과 지리산 구재봉(767.5m), 분지봉(628m) 등을 오르내리는 4시간 동안의 산행에서 이루어졌다.

남씨는 “통일이 되어 백두산 천지까지 그야말로 백두대간을 완전히 종주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남씨는 찻잎을 따고 된장을 담그며 소박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의 눈빛과 발걸음에서는 히말라야와 백두대간의 정기가 여전히 살아있는 듯 했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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