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이큐(IQ) 210의 신동(神童) 김웅용 군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국내에서는 잊혀졌다. 그러나 2006년 미국 마퀴스 세계 인명사전과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가 선정한 ‘21세기 우수 과학자 2000’ 등에는 잇달아 이름이 올랐다.

서너살 때 IQ 210의 천재 소리듣던 충북개발공사 김웅용 기획홍보부장
보통사람 되고싶던 소박한 꿈 이뤄, 40대 가장으로 형제 키우면서 자족

최근에는 루마니아 외신들이 그를 ‘세계 3대 천재’라고 보도해서 화제가 됐다. 필자가 지난 3일 청주에서 만난 김씨는 어느덧 48세. 공기업인 충북개발공사 기획홍보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예의 바르고 반듯한 ‘보통사람’이었다.

김씨는 양친이 모두 교수인 집안에서 4남1녀 중 맏이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만 4세가 된 1966년 한양대 물리학과에 특별입학하자 국내외 언론이 주목했다. 이듬해 일본 후지TV에 출연해서 미적분 문제를 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두뇌 측정기관의 IQ테스트에서는 모든 문제를 맞히자 ‘측정불가’ 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IQ와 천재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남들이 살면서 단계적으로 천천히 배우는 것들을 어린 나이에 조금 빨리 익혔을 뿐입니다. IQ라고 하는 터먼지수는 최고치가 200인데 일본의 수학자 야노 겐타로 교수가 출제한 미적분이 마침 아는 문제여서 정답을 썼더니 보너스로 10을 더 주는 바람에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것입니다.”

 
◇ ‘세계 3대 천재’ 김웅용 씨 부부가 두 아들과 꽃밭에서 포즈를 취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1970년 일곱 살짜리 천재소년을 초청했다. 친척도 없는 미국에서 그는 일주일의 절반은 콜로라도 주립대 대학원에서 핵과 열 물리학을 공부하고, 나머지는 휴스턴 NASA 연구소에 파묻혀 지냈다.

등하굣길도 힘든 나이에 미 대륙의 머나먼 서부와 동부를 비행기로 매주 통학ㆍ통근한 것이다. 석ㆍ박사과정을 마치고는 NASA의 핵물리학 분야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NASA에서 부여하는 과제를 계산기처럼 수행하는 단조로운 생활에 차츰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폐쇄된 연구소에서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민하다가 정체성을 찾고 싶어 9년 만에 미국생활을 접고 싶었습니다.”

NASA에는 통보도 하지 않고 1978년 서둘러 귀국했다. 불과 16세 였다. 카이스트(KAIST)에 원서를 냈으나 졸업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퇴자를 맞았다. 초등학교 졸업부터 대입자격까지 검정고시를 치렀다.

대입 체력장 보던 날, 달리기와 턱걸이를 하는 바로 앞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연거푸 터졌다. 다음날 신문에 사진과 함께 ‘실패한 천재’ ‘천재가 바보가 돼서 돌아왔다’는 기사가 났다. 기가 막혀 숨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청주로 내려가 충북대에 입학했다. 전공도 물리학에서 토목공학으로 바꿨다.

캠퍼스의 낭만을 마음껏 구가했고 친구도 많이 생겼다. 대학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KAIST 대우교수,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원 등을 지냈다. 1998년 봄 동아리에서 만난 조경자 씨(43)와 결혼, 두 아들을 두고 있다.

2006년 충북개발공사 창립멤버로 입사한 김씨는 자신이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왔을 때 품어줬던 충북과 청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타의에 의해 천재로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은 언제부턴가 지능지수가 아닌 행복지수에 맞춰져 있다. 동료들과 퇴근 후 나누는 한 잔의 막걸리, 아이들과의 공차기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이 시대의 평범한 가장이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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