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을지로 3가 대로변에 75년 동안이나 뿌리를 깊게 내린 회사가 있다. 국내 최초의 등산화 전문 메이커 송림수제화가 바로 그곳이다. 송림수제화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가죽신을 만들던 ‘갖바치’ 이귀석 씨가 송림화점으로 창업한 이래 같은 자리에서 장인정신을 잇고 있다.

국내 최초 송림수제화 임효성 씨 父子
을지로 같은 자리서 대 이은 장인정신
그 옛날 갖바치처럼 한 땀 한 땀 정성
남북극 탐험 산악인 허영호 씨도 단골

1960년대 등산인구가 늘면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대문 시장에서 파는 영국군 군화를 신고 산에 올랐다. 밑창이 닳으면 송림화점을 찾아와 새것으로 바꿔 붙이는 사람들이 자연히 늘어났다. 타고난 사업가였던 이씨는 그때부터 제대로 된 등산화를 만들기 위해 3년 동안 연구를 거듭했다.

고무 밑창에 쇠 징을 박아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는 등산화를 개발한 데 이어, 파라핀 등 특수약품과 열처리로 방수·방습효과가 뛰어난 제품을 잇달아 선보여 히트를 쳤다. 당시 통가죽으로 투박하면서도 기능성이 돋보인 송림의 등산화는 산 꾼들 사이에 인기였다. 한 켤레 값이 쌀 세 가마니와 맞먹을 정도였지만 주문이 밀려들었다.

1996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씨는 고객들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보내준 편지 100여 통을 남겼다. 이 가운데 장애인도 많았다. 송림은 이씨의 차남 덕해 씨(61)가 한동안 운영했다. 현재는 창업주 곁에서 20대부터 기술을 익힌 외종질 임효성 씨(78)와 그의 아들 명형 씨(49)가 고문과 대표를 맡아 송림의 대를 잇고 있다.

 

 

 

 

 

 

 

 

 

◇송림수제화 임효성 고문이 75년 노포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산악인 허영호 씨는 고교 산악부 시절부터 단골이다. 허씨가 북극점(1991년)과 남극점(1994년)을 도보 탐험할 때도 송림의 설상화를 신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가택 연금된 김영삼 전대통령과 송림의 일화는 유명하다.

상도동 자택 마당을 수없이 돌며 분노를 삭이던 YS가 등산화 밑창이 닳으면 비서를 보내 수선해 갔다. 등산화뿐 아니라 신사화, 숙녀화, 티롤화, 장애인화, 골프화, 특수화까지 손으로 만든다. 한때 티롤화가 유행하면서 모 방송국 PD들이 단체로 송림에서 구두를 맞춰 신었던 일도 화제가 됐다. 현장을 뛰면서 그만큼 편한 신발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외피와 내피가 천연가죽인 송림수제화는 창갈이만 하면 20년도 넘게 신는다.

스펀지 재질로 특수 제작한 족형기구로 발의 치수를 잰 다음, 천연 코르크에 발 모양을 그대로 본 떠 만드는 중창과 고무 소재의 가벼운 밑창은 충격흡수 기능이 탁월하다. 발 모양에 따라 가죽을 자르고 특수미싱으로 재봉하기까지 수많은 공정을 거친다. 요즘은 송아지가죽을 많이 사용하는데 말, 악어, 양가죽도 최고로 친다.

임 고문은 “발바닥에 오목하게 들어간 족궁의 모양새를 잘 살려야 구두가 발의 일부처럼 편하게 느껴진다.” 며 “수제화만이 신체적 특성을 제대로 맞출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업화를 하자는 주변의 유혹도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좋은 구두를 만든다는 자긍심으로 100년 기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넷과 입소문으로 찾아오는 고객이 많아졌다. 20~30대 단골도 늘고 있다. 특히 장애 후유증으로 발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안성맞춤 식으로 제작해주는 송림의 장애인화는 미국, 일본의 교포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객이 전화로 주문하면 자택으로 찾아가 본을 떠와서 구두를 제작해 보내주는 방문판매도 하고 있다.

수제화 한 켤레를 만드는데 5~7일 걸리며 가격은 등산화의 경우 30~60만원 정도이다. 모든 것이 기계화 시대인 오늘날, 그 옛날 갖바치처럼 한 땀 한 땀 수제화만을 고집하는 송림은 정상에 도전하는 산악인의 집념을 닮았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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