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바다 외딴 섬에 ‘박(朴)약방’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면(面) 단위 섬에 초등학교 분교가 하나 있었을 정도니 인구는 짐작할 수 있겠다.

두 돌을 갓 넘긴 아이가 자정이 넘어 고열로 울며 보챘다. 엄마는 아이를 들쳐 업고 약방문을 두드렸다. 주인 박씨는 아이의 이마를 짚더니 사주(四柱)를 물었다. “이놈은 세 살을 못 넘깁니다.”

엄마는 해열제 한 봉지를 사 들고 아이와 함께 울며 밤새 바닷가를 걸었다. 그 아이가 자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광복 이후 무의무약(無醫無藥) 지역이 많았다. 이러한 애로를 해소하느라 1953년 정부는 약종상 면허제도를 만들었고, 자격자에게 약방 개설을 허가했다. 약품을 조제할 순 없지만 제한된 지역에서 판매할 수 있으며 소소한 진료행위도 굳이 금하지 않았다.

1971년 약사법이 개정되면서 이 제도는 사라졌으나 면허증의 효력은 유지되어 지금까지 전국 300여 곳에서 약방을 운영하고 있다. 1971년 이전에 면허를 취득했으니 자연스럽게 소멸될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다.

50여 년 전의 추억을 되새긴 것은 ‘일반약 약국 외 판매’를 둘러싼 심각한 논란 때문이었다. 무의무약은커녕 의사와 약사, 의원과 약국이 넘쳐나는 시절이지만, 지금도 ‘옛날 약방’의 수요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무의무약 지역이 남아 있음은 물론이고, 견디고 버티는 게 일상이었던 옛날과 달리 약간만 속이 불편하거나 조금만 몸이 아프면 약부터 찾는 세태이기에 오히려 그 아쉬움은 더 클 수도 있겠다 싶다.

옛날의 약방은 세 가지 정도에서 약국과 다른 점이 있었다. 1년 365일 연중무휴로 문을 열어놓았고, 하루 24시간 언제라도 손님을 맞아 주었다. 주인이나 환자가 뻔히 아는 병이라면 무슨 약을 쓴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으레 사고팔았기에 부작용을 염려하는 기색도 없었다. 가끔 사주를 봐주거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사랑방 역할은 덤으로 얹혔다.

의약분업이 시행된 2000년 이후 약국은 조제권을 잃은 대신 판매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약방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환자로선 연중무휴 심야구매가 거의 불가능해졌고, ‘아는 약’을 구하는 데도 적잖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옛날 약방을 부활하자는 여론이 일어 16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의원이,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의원이 무의무약 지역에 한해 약종상 면허제도를 살리자는 입법청원을 내놓았다. 물론 약국들의 반대로 심의조차 제대로 못한 채 무산됐다.

한 가지, ‘사랑방 역할’은 동네 약국들이 자연스럽게 이어 받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지역구 국회의원들에 대한 정치적 압력의 수단이 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국회 통과가 안 될 것’이라며 약국 외 판매를 위한 약사법 개정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죽하면 해당 장관이 자신의 지역구 약사회를 향해 “염려 마시라”며 해명까지 했겠는가.

복지부 주도로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서 약국 외 판매 일반약의 재분류 문제를 놓고 한창 격론을 벌이고 있다. 처음엔 복지부와 약사회 사이에서 일반약의 연중무휴 24시간 편의점 판매 품목을 싸고 소동을 벌이더니, 이어 약사회와 의사협회 사이에서 일반약과 전문약의 경계 문제로 다툼이 번져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소비자를 위한 안전성 문제보다 시장성과 매출액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한 예로 약국에서 박카스를 박스째로 살 때도 많이 마시면 혈압이 오르니 한 병만 마시라는 경고(복약지도)를 들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약방제도를 부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옛날의 약방’이 갖고 있던 그 필요성을 국민이 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현재의 약국들이 도저히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국민이 원하는 제도와 공간은 마련해 주여야 한다. 의사나 약사 정도의 엘리트라면 한 번쯤 초심으로 돌아가 국민과 환자의 입장에도 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병진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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