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효창공원에서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만리동 고개에는 예부터 서민들의 애환이 녹아있는 장터가 있다. 특히 배문중고 건너편 시장 초입에 쓰러질 것 같은 성우이용원(주인 이남열ㆍ62)은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한쪽이 무너져 내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꿨다. 슬레이트 밑에는 아직도 당시의 수수깡과 볏단이 남아있다.

만리동고개 성우이용원 주인 이남열 씨
200여 년 된 고옥서 3대째 가업 이어
전통 기법으로 손님 한 명에 80분 소요
정·재계 인사 등 전국에 단골 200여 명

성우는 1927년 조선인 2호 이발사였던 이씨의 외할아버지 서재덕 옹이 머리를 깎던 초가집에서 출발했다.
200년 넘은 건물은 너무 낡아 볼품없지만 3대째 84년의 가업을 잇고 있는 주인 이씨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그는 지난달 24일 찾아간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위와 빗을 들었다고 모두 이발사가 아닙니다. 저의 전통이발기술을 따라올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같은 세태에 손님 한 사람에게 1시간 이상 정성을 기울이는 이발사는 없기 때문이지요.” 7남매의 다섯째인 이씨는 열여섯 살이던 1965년부터 부친 이성순 씨(1984년 작고)에게서 이발기술을 배웠다.

1970년 면허증을 땄으나 바로 이발사가 된 것은 아니다. 젊은 혈기에 사주와 풍수지리를 배우기 위해 10여 년간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방황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이발업계의 경기는 내리막길이었다.

퇴폐이발소가 사회문제가 되면서 손님들이 간단하고 빠르게 머리를 깎고 다듬는 목욕탕이나 미용실로 흩어져 버렸다.

◇ 46년 경력의 이발사 이남열 씨가 삼색등이 돌아가는 이용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래도 이씨는 손님 한 명에게 80여 분 간 매달리는 전통이발기법을 고수했다. 가위만 해도 초벌 막 가위, 숱 가위, 중벌 가위, 마무리 가위 등 5개를 번갈아 사용한다.

빗은 40년 된 것도 있다. 모두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들이다. 이씨는 오전 8시 전동의자가 3개뿐인 4평 남짓한 이발소에 나와 연탄불을 갈고 물을 데운 뒤 100년 된 말 가죽에 면도날을 ‘슥삭슥삭’ 갈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면도 중에는 쌍둥이 칼로 유명한 독일 헨켈사가 130년 전에 만든 것도 있다. 이씨는 손님의 뒷머리에 분가루를 서너 번 발라 머릿결을 고른다.

면도하기 전에는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 솔을 난로의 연통에 둥그렇게 비빈다. 타일 붙인 세면대에서 화초용 물뿌리개로 머리를 감기는 모습이 추억의 동네이발관 그대로이다.

1950년대 제니스 라디오와 40년 된 신일선풍기가 아직도 쌩쌩 돌아가 이발소의 분위기를 더욱 빈티지하게 만든다. 이씨는 조수도 없이 이발, 면도, 세발, 드라이, 염색까지 도맡아 한다.

밤 9시까지 일해도 시간이 없어 하루에 10명 이상의 손님은 받지 못한다. 몇 해 전 그는 서울 강남의 최고급 이용원에서 거액을 제시하고 동업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외조부와 부친의 외길인생을 따라 걸어온 지난날이 너무나 소중해서였다.

매주 수요일에는 문을 닫고 하루 종일 북한산을 오르내리면서 체력을 기른다. 최근에 개방된 김신조 루트를 자주 찾는다. 젊었을 때부터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손끝이 떨리면 이발사로서 끝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맑게 하려고 고기도 닭 가슴살만 먹는다.

성우이용원의 단골은 200여 명인데 동네 학생들부터 정·재계인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기업 회장만 8명이다. 예약을 받지 않아 내로라하는 회장도 차례를 기다리고, 세발할 때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 7년 단골인 노회찬 전의원은 20일마다 이발하고 가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린다.

공덕동 토박이 이씨는 외아들(25)이 가위손의 대를 이어주기를 바라는데 아직 미지수이다. 조선 세종시대의 학자 최만리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만리재. 그곳에서 오늘은 청·적·백색의 삼색등이 백 년을 향해 돌아가고 있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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