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53·미국명 존 린튼)은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 갑 총선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하고 한국인이 된 것을 실감했다. 그는 최근 특별귀화자 1호로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특별귀화는 일반귀화와 달리 본인의 공로가 인정되어 주어지는 것이다.

인 소장은 묵은지와 보쌈, 주꾸미를 좋아하며 영어보다 유창한 전라도 사투리는 구수하고 질퍽하다. 190㎝가 넘는 장신으로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 지난 8일에는 고향인 순천에 내려가 이 지역에 출마한 민주통합당 노관규 후보를 위해 지원유세도 했다.

그는 “나는 순천토박이로 어린 시절 아랫장터와 웃장터를 돌며 놀았다” 며 “얼마 전 특별귀화한 나를 봐서 노 후보를 밀어달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인 소장은 대전외국인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 1학년이던 1980년 5월 순천에 갔다가 광주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을 듣고 어머니 병원의 외국인 전용 0번 차량을 타고 광주에 들어갔다.

검문소마다 미국대사관 직원이라고 둘러대 통과했다. 전남도청에서 취재 중이던 외신기자들은 시민군과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인 소장은 시민군 대표와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을 3시간 동안 통역했다.

양쪽의 의사를 소통시켜 준 이 일이 그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광주사태 주동자로 몰려 요시찰 인물이 된 것이다. 미국대사관에서 곧 추방할 듯이 엄포를 놨다. 유배 가듯이 순천으로 내려가 병원 일을 거들며 소일했다. 지리산에 올라 울분을 삭이는 날이 많았다.

대학이 정상화한 후 문무대에 입소하는 친구들을 보고 학도호국단을 찾아가 자원했다. 미국대사관에서 어렵게 허락을 받아 문무대에 입소해 9박 10일간 훈련을 받았다. 그는 “당시 나를 미행하고 감시하던 사찰요원들에게 나는 빨갱이도 아니고 반체제 인사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1981년 캠퍼스 커플인 이지나 씨와 결혼하고 광주 후유증에서 차츰 벗어났다. 예과 시절 교양과목인 한국사가 너무 어려워 천신만고 끝에 본과를 1987년 졸업하고 의사국가고시에도 합격했다.

인 소장은 117년간 선교와 교육문화사업으로 4대째 한국을 사랑하는 린튼가(家)의 후손이다. 1895년 호남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유진 벨 선교사가 진 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

유진 벨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 목포와 광주에 학교를 잇달아 설립했다. 인 소장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전주 신흥학교 교장 시절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1940년 강제 추방됐다. 1959년 대전대학(현 한남대)을 설립해 초대학장을 지냈다. 정부는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인 소장의 아버지 휴 린튼 목사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1984년 지프를 몰고 가다가 음주운전 관광버스가 들이받아 병원으로 가던 택시 안에서 운명했다.

어머니 로이스 린튼(인애자·83) 여사는 순천에서 결핵재활원을 운영하면서 40년간 결핵퇴치사업을 한 공로로 국민훈장을 받았다. 대북 의료지원 민간단체인 유진 벨 재단 스티브 린튼(인세반·61) 회장은 인 소장의 형이다. 형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수십 차례 북한을 방문, 결핵약품과 의료장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1992년 미국에 있는 아버지 친구들이 8년 동안 조의금 4만 달러를 모아 보내왔다. 인 소장은 이 돈으로 4년 동안 연구개발에 힘써 1995년 최초의 한국형 앰뷸런스를 제작했다.

그는 “내 영혼의 발원지는 사랑을 실천한 완벽한 크리스천인 산돌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말한다. 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 옥고를 치렀고 여순사건 때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전도사로 키워냈으며 1950년 북한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푸른 눈의 인요한 소장. 그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다.  /설희관 언론인·시인

저작권자 © 대한전문건설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