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일부러 시를 찾아 읽지는 못합니다. 가슴이 점점 말라간다는 이야기겠지요. 그러나 요즘 신문들마다 매일 시 한 편씩을 소개하고 있어서 전보다는 자주 시를 접합니다. 해설도 곁들여져 있어 간혹 ‘좋은 시’를 만나면 메마른 가슴이 풀리기도 합니다.

시인들은 사물과 사건을 보는 눈이 어찌 그리 예리한지요. 저 같은 보통사람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롭게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시를 쓰는 것이 직업인만큼 남다른 눈과 능력이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날카로움과, 그 날카로움으로 찾아낸 것들을 운율에 맞춰 한 편의 시로 꾸며내는 걸 보면 놀라고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임채성이라는 분이 쓴 ‘지 에이 피’라는 시를 한 번 읽어 보세요.<지나치듯 슬몃 본다,/백화점 의류매장/명조체로 박음질한 GAP상표 하얀 옷을/누구는 ‘갑’이라 읽고/누군 또 ‘갭’이라 읽는,//사람과 사람 사이에도/갑이 있고 갭이 있다/아무런 잘못 없어도 고개 숙일 원죄 위에/쉽사리 좁힐 수 없는 틈새까지 덤으로 입는,//하루에도 몇 번이고 갑의 앞에 서야 한다/야윈 목 죄어 오는 넥타이를 풀어버리고/오늘은//지, 에이, 피를/ 나도 한번 입고 싶다>

기막히지 않습니까? 백화점 매장에서 상표를 보고는 ‘갑을관계’를 찾아내다니, 그리고 ‘갑’과 ‘을’을 구분하는 ‘갭(틈새)’을 생각해내다니,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갑이 있는 것은 그 만큼 갭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의 능력이 말입니다. 저말고도 갑을관계에 천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갑기도 하지만 제가 ‘갑을칼럼’이라는 제목으로 써온 모든 글이 이 시 한 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다음 시는 박주택이라는 분이 쓴 ‘폐점’입니다.

<문 닫은 지 오랜 상점 본다/자정 지나 인적 뜸할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형/한 때는 옷을 걸치고 있기도 했으리라/그러나 불현듯 귀기(鬼氣)가 서려오고/등에 서늘함이 밀려오는 순간/이곳을 처음 열 때의 여자를 기억한다/창을 닦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아이도 있었고 커피잔도 있었다/작은 이면도로 작은 생의 고샅길/오토바이 한 대 지나가며/배기가스를 뿜어대는 유리문 밖/어느 먼 기억들이 사는 집이 그럴 것이다/ 어느 일생도 그럴 것이다>

제가 한 때 살았던 동네에 잠깐 문을 열었다가 금방 망해버린 가게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아파트 단지가 입주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그 동네 상가에는 텅 빈 점포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그중 한 점포에 여자 옷가지를 파는 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문 열기 전날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젊은 여자가 마네킹에 옷을 걸고 있었고, 그 옆에는 딸인듯 어린아이 하나가 천진하게 혼자서 놀고 있었지요. 가게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예쁜 여자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딸 아니면 자기 이름이었겠지요. 유리문에도 색종이 위에 형광펜으로 이것저것 글씨로 손님을 부르는 말을 적어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두어 달 지나지 않아 그 가게는 폐점했습니다. 보증금과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가게를 열고 아이 유치원 비용이나 벌었으면 했겠지만, 이면도로인 데다 큰 길로 조금 걸어 나가면 재벌계열사의 초대형 신축백화점과, 같은 계열사의 대형 마트가 있는데 누가 그곳을 찾겠습니까? 얼마 뒤 그 자리에 미장원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모릅니다. 그 옆에 있던 젊은 부부가 하던 빵집은 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앞서 ‘좋은 시’를 만나면 메말랐던 가슴이 풀린다고 했지요. 하지만 이런 시들은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좋은 시’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나쁜 시’? 아니 ‘아픈 시’겠지요. ‘아픈 시’는 안 나오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정숭호 코스카저널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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