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 선종했을 때 온 국민이 슬퍼했다, 김 추기경은 병세가 악화됐는데도 영양 섭취를 제외한 일체의 기계적 치료를 거부하고, 연명치료 중단 의사를 밝혔던 분이다.

80세 기념 미사에서 “내 발로 화장실을 드나들다 생을 마치고 싶다.”고 했던 바람은 이루지 못했지만, 김 추기경은 약속대로 각막을 기증하고 떠나갔다.

고혈압과 당뇨에 오래 시달려 온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도 폐암 선고를 받자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투병하다 10개월 만에 타계했다. 인간은 자연과 하나라며 자연의 순리에 맞게 살아 온 작가다운 죽음이었다.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작가의 기본자세”라고 강조했던 박 씨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시집을 남기고 육신을 버렸다.

존엄사 논란을 키운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 사건 재판에서 유족 측 변호인은 이런 사례를 재판부에 제출했고, 결국 대법원의 존엄사 허용 판결을 이끌어냈다. 김 할머니는 연명치료를 중단했는데도 201일 동안 살아 있다가 2010년 1월 사망했다. 대법원은 2009년 5월 “인공호흡기에 의한 연명은 인격적 가치를 제한하는 것이므로 병원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었다.

지난 2일 국가 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김 할머니의 사망 2년 여 만에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제도화를 추진키로 의결한 것은 오히려 늦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의결 내용은 말기 암환자가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장치를 거부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법제화 논의는 사실 수년 전부터 진행돼 왔고, 자체 지침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하거나 보류하는 의료기관도 많아졌다. 법제화에서는 환자 본인이 아닌 보호자의 ‘추정동의’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 일부 쟁점이 해결되지 않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마련한 ‘존엄사’ 법안은 의학적 기준에 따라 2인 이상의 의사가 진단한 말기 환자를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대상 환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모든 쟁점에 대해 국민의 의사를 광범하게 들어 합리적 기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소극적 행위만이 아니라 존엄사 그 자체여야 한다. 존엄사의 개념도 더욱 확장하고 심화시켜야 한다. 존엄사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행위’라고 정의돼 있는데, ‘인간의 품위와 개인의 가치를 지키면서 죽는 행위’라고 의미가 더 확장되면 좋겠다.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의 저자 스콧 니어링(1883~1983)은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단식을 통해 죽음을 맞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무능력자가 되어 남들에게 짐이 되거나 요양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오랜 기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처럼 곡기를 끊고 조용히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다가 간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많다.

이런 죽음은 자살인가? 남들은 100세나 장수했으니 어떻게 죽든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에 대한 집착은 수명의 장단과는 관계가 없다. 이런 죽음을 자살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존엄사의 한 모델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21세 연하였던 그의 아내 헬렌 니어링(1904~1995)은 집 근처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편처럼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보낼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함께 흐르세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연명치료 중단 문제를 넘어 품위 있고 의미 있는 죽음을 저마다 깊이 생각하는 게 좋겠다. 릴케의 시에 나오는 대로 ‘그 자신만의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임철순 한국일보 이사대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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