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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icon 이승만
icon 2021-03-02 00:48:27  |   icon 조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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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 1910


이승만 '독립정신'




[ .....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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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의 李承晩,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李承晩이 1904년 獄中에서 썼다가 출옥한 뒤 출판했던 '독립정신'을 읽어보면 그는 20代 후반에 이미 정신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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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에는 ‘요약과 결론’에 해당하는 ‘後錄’이 있다. 여기서 뽑은 말들을 소개한다. 이 글이 104년 전 29세의 조선 청년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1. 우리는 세계와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 通商(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3. 오늘날 通商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4.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5. 외국인들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文物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1.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3. 외국인의 압제에 대해선 싸워야 한다. 외국인에게 뭇매를 맞은 한국인이 그 외국인을 죽이고 경찰에 자수한 일은 칭찬할 것이 못 되지만 그 의지는 본받을 만하다. 4. 동양의 옛날 책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국제법, 통상조약,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5. 과거의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조차도 버리고 바꿀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사람과 가정과 나라가 모두 새롭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영국과 미국과 같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힘쓰면 일본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6. 물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하다. 7.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 공부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한 투자이다. 9. 유학을 간 사람은 나라를 위해 시급한 것부터 공부하여야 한다. 귀국할 형편이 못 되더라도 뿌리치고 반드시 귀국하여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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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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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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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1.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2. 다른 사람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 우리 집 종이나 다른 사람들의 하인, 또는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존중해야 한다.

3. 개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폐단이 있더라도 윗사람들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보는 것이 옳다.

3.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활력이 생겨서 몇 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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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哲人통치자 李承晩이 선물한 자유가 국가경쟁력의 源泉이다.

趙甲濟








이제 후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지난 3월 26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1941년판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 (일본, 그 가면의 실체)의 번역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송방용 헌정회(憲政會) 회장은 “내가 95세를 살면서 역사를 좀 알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좌우합작’이다 ‘찬탁(贊託)’이다 라고들 할 때 이승만 박사의 ‘단정(單政)’노선이 관철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자유와 번영도 없었을 것”이라며 원로로서 애국충정을 토로하였다.


이어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이승만 박사는 호놀룰루의 병상에서 아들 이인수 박사에게 우리나라 사람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시고, ‘이제 후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전하였다.

자유인이라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값을 치른다. 자유는 공짜로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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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진영이 대립하여 피생아사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는 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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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彼生我死로 투쟁하고 있어



이승만은 이튿날 국회 개원식에 나가서도 반공을 강조하는 치사를 했다. 그는 지금 세계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피생아사〔彼生我死·네가 살면 내가 죽음〕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가 두 종류의 사상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진영이 대립하여 피생아사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믿었든지 저희 나라도, 저희 국가도, 저희 생명도 다 바치고 공산화해서 남의 속국과 노예가 되기를 감심(甘心)하는 분자들이므로 우리는 우리나라와 우리 가정과 또 우리 자유를 보장해서 다 같이 잘살자는 목적으로 우리의 목숨이라도 희생해서 민주주의를 세우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가 자유로 살 수 있고 우리 자손까지도 자유로 잘살 수 있을 것이지만 공산주의에 정복을 당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몇십년 동안은 이러한 희망조차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다 적색화할지라도 우리로는 꿋꿋이 싸워서 죽어도 자유민으로 죽고 살아도 자유민으로 살겠다는 결심뿐인 것을 세계에 한번 표명해야 우리가 죽어도 산 백성일 것이요 살아도 영광스러운 생명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바는 모든 세계가 다 남에게 속아서 공산주의의 압박을 감수할지라도 모든 민주국들이 다 자유와 독립을 희생하고 공산화해서 살려고 아니할 것이므로 언제든지 결국은 민주주의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 것이니, 이것을 알고 믿는 우리로서는 조금도 주저나 의뢰하지 말고 공산분자들과 함께 섞여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맹세해야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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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109.주한미군의 철수와 국회 프락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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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6.25. 동아일보



오호! 조국

< 6.25 11주에 즈음하여 >



조병화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였고
그러하듯이
후일의 역사가는
오늘 이날을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 남침하다'
이렇게 그저 한줄로 정리해버리겠지만
그렇게 정리를 당하기엔
너무나 비참한
생생한 현실
불구의 가족, 불구의 나라, 불구의 기억이 아니냐



아 !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였고
그러하듯이
후일의 역사가는
오늘 이날을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 남침하다'
이렇게 그저 한줄로 해치워버리겠지만
그 공포, 그 불안, 그 학살, 그 파괴,
그 약탈, 그 기아, 그 린치,
그 고문,


살륙의 백주에서
너와 나의 생존은 창백한 기적
인간불모의 그저 먼지였다



생명은 내것도 아닌 것
네것도 아닌 것
2천만, 천만, 합하여 3천만
조국이라는 이름의 하나
우리의 것


조국이여
보금자리여



죽어간 사람과 남은 사람이
기억 속에서 만나는 오늘
너와 나는
서로 사랑을 기르자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였고 그러하듯이
후일의 역사가는
오늘 이날을 단 한줄로 정리해버리겠지만
아! 너무나 으스러진
너와 나의 가슴



자유여 !
호흡이여 !
손목이여 !









2007.11.


[사설] 남·북한 운명을 가른 60년 전 건국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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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日帝일제의 35년 강점에서 벗어난 지 3년이 지난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한 달 뒤인 9월 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당시 북한은 핵심 지하자원인 석탄과 철 광산에다 일제가 만든 비료공장과 발전소들이 서 있는 산업지대를 차지했고, 남한은 공업이라곤 신발공장과 정미소가 고작인 평야지대에 둥지를 틀었다.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지금 남한의 국민총소득(GNI)은 8873억 달러, 북한은 256억 달러로 남한이 북한의 34.7배다. 1인당 국민소득은 남한이 1만8372달러, 북한은 1108달러로, 남한이 북한의 16.6배다. 무역은 남한이 6348.5억 달러, 북한은 30억 달러다. 남한이 211.9배다. 발전용량은 남한 6551만㎾, 북한은 782만㎾, 원유도입량은 남한 8억8843만 배럴, 북한은 384만 배럴이다. 경제성장률은 남한 5.0%, 북한은 -1.1%로 남북한의 경제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경제자유도 순위도 남한은 36위인 데 비해 북한은 157위로 세계의 바닥이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 속에서 남북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결단과 안목 차이가 이런 格差격차를 낳았다. 남북의 이런 격차는 또 ‘자유의 존재’와 ‘자유의 결핍’이 만든 차이기도 하다. 자유가 단순히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모든 資源자원에 앞서는 ‘기본 자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의 운명을 가른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에 대한 남북의 대접은 정반대다. 북한은 9월 9일을 국경절로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데 비해 남한은 같은 날인 광복절에 가려 건국일이라는 사실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지난 8월 조선일보 여론조사 결과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지 아느냐?”라는 질문에 ‘알고 있다’라고 답한 사람은 32%에 지나지 않았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建國史건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시절”로 규정했고, 좌파들은 左右合作좌우합작의 통일정부를 만들지 못했다는 이념 공세를 앞세워 건국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있다. 내년 8월의 건국 60년 기념행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의를 재확인하고 건국 元勳원훈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 자유와 시장경제의 토대 위에 통일의 길을 열어가는 출발점으로 삼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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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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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이 건국 이정표의 단초



실향민 단체의 부설 연구소에서 지난 90년대에 ‘이북도민의 월남동기 및 월남시기’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를 볼 수 있었다. 실향민 1세(직접 월남 당사자) 1030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귀하가 월남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ㆍ북한공산통치를 체험하고 공산당이 싫어서 … 50.8%

ㆍ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다가 피신 또는 탈출하여 … 16.1%

ㆍ공산당에 의해 반동분자(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로 찍혀서 …15.1%

ㆍ어린 나이였으므로 그저 어른들 손에 이끌려서 … 3.2%

ㆍ기타 10여 가지 이유의 합계 … 14.8%



이 통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산북한 체제에 등을 돌리거나 반동으로 쫓겨서 등 적극적인 탈북 동기가 82%에 달했다. 그러면 절대다수 월남자들은 북한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체험했기에 고향조차 버렸던 것인가.


그들은 소련군의 노략질과 폭행을 보았다. 가짜 장군 김일성의 독재를 보았고 자유민족진영에 대한 탄압을 보았다. 공산체제의 강화와 토지개혁의 기만성을 보았고, 종교박해를 겪었으며, 정치보위부라는 비밀경찰에 신경을 써야 했고, 공산당 외곽단체 강제 가입 강요에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 김구 등 민족계 지도자에 대한 악의적 성토를 줄곧 들어야 했으며, 인민군의 강화로 남침 준비에 광분하는 낌새를 감득할 수 있었다.


월남자들이 전하는 북한의 실상을 한마디로 ‘생 지옥’같은 세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가정법으로, 만약 월남자들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남한에서의 ‘북한관(觀)’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평양방송이 불어대는 소위 ‘민주개혁’의 성과로 북한은 이상적인 지상낙원처럼 비쳐질 판이었고,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선동선전에 현혹되어 남한의 민심도 북한체제를 추종해야 되는 것으로 왜곡될 판이었다. 월남자 대열이 형성되어 생지옥 같은 북한의 참상을 낱낱이 폭로함으로써 남한 국민들은 ‘안티 북한’의 지표를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자들의 발걸음이야말로 자유대한을 건국하는 이정표의 첫걸음이었다고 말하는 소이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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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 .......

...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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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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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 ]




* 1948.4. [ 南北協商 참가 某黨의 결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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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의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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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韓人 當路者들은 독립은 못 되었을 망정, 정권의 이양을 받았다고 만족해하는 동시에 傲驕한 태도가 현저한 것


7. 한인 당로자들의 소련과 소련인에 대한 호감은 우리 조상들의 明에 대하였던 그것과 꼭 같은 것

8. 가로와 실내에 遍滿하게 金××과 스××의 사진을 모신 것


9. 전시 기분이 충만하여 투쟁목표를 확정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는 미국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국내적으로는 ×××박사와 金××씨를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수괴로 지정한 것


10. 인민의 얼굴에는 飢餓의 색채가 있고 태도에는 공포가 있는 것

11. 전부가 인간성을 떠나 기계화한 것

12. 자유기분이 결여한 독재적 태도가 처처에 나타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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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南北協商을 비판 : 某黨의 결산서>


게재지명 조선일보

게재일자 1948년 10월 10일




1948년 4월 미소 양군정하에 있어 자율적이란 입장으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정당단체대표자대회(소위 남북협상)는 好不好간에 후일 조선의 독립사상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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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남북협상에서 귀경후 ×월 ×일, 모 당 ××위원회를 통과한 일부이며 익명 외 첨삭이 없음을 부언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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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2.


[ ....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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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UN총회 석상에서 행한 미측 대표 덜레스씨의 발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남조선에서의 미군 또는 미 과거의 업적이나 실패를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蘇측이 비판하는 바 많은 남조선미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을 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주저치 않는 바다.

그런데 가장 민주주의인 시책이 질서 정연하게 실시되고 있다는 북조선을 소련측이 UN위원단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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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중국대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해 언명


게재지명 조선일보,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7년 12월 28일



조선파견 UN위원 중국대표 劉馭萬(유어만) 환영회는 26일 하오 6시부터 국제외교연구소 주최로 天香園에서 성대히 열리었는데 석상 劉씨는 UN위원단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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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49.5.13.



[ ..... 농민에 대한 현물세는 2할7부인데 실제에 있어서 5할이상을 .......

...... 노동시간외에 강압적으로 매일 그 어떠한 집회에도 참석할 의무를 ....... ]




이북은 지옥


월남동포담



본적을 38이북 함남 북청군에 둔 염철 씨는 지난 4월 14일 당지를 출발하여 경기도 파주군을 거처 5월 6일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최근 이북의 실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북에 있는 절대다수의 동포는 괴뢰독재정권에 신음하고 있다. 농민에 대한 현물세는 2할7부인데 실제에 있어서 5할이상을 빼앗기고 있다. 노동자는 8시간 노동제의 미명하에 노동시간외에 강압적으로 매일 그 어떠한 집회에도 참석할 의무를 지게 되어 있어 자유로운 시간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세금으로써 시민의 고혈을 착취하기 위하여 산업은 대소를 막론하고 등록제로 되어 있으며 막중한 세금에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악정이 다수의 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괴뢰정권을 좌우하는 계급의 야망인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부락은 홋수가 약백호나 되는데 강제로 징병간 청년이 다수에 달하고 있다.







1949.7.



[ ......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 ]



북한 한 마을 天道敎靑友黨員 100여 명이 집단 월남



경향신문

1949년 07월 08일




이북공산당정권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한 부락이 송두리째 월남한 사실이 있다.


즉 강원도 춘성군 공고리에 살고 있는 26가구 102명이 지난 7월 1일 밤 9시경 북한괴뢰군이 없는 틈을 타서 월남하여 왔다. 그들 가운데는 76세나 되는 노인도 있으며 그들은 소 21頭를 끌고 월남하여 강원도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청우당원으로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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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5.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되면 좌우의 비율은



[ .....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되면 좌우의 비율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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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진영이 절대 다수를 점령할 것이다. .....

애국진영이 절대 우세를 점령할 것은 틀림없다. ......

우리가 생각하는 방안으로 통일이 성취된다면 좌익은 없을 것이다. ...... ]




5·10선거 1주년에 즈음한 각계의 여론 동향



동아일보

1949년 05월 10일



아시아 대륙에 있어서 침투 확대되고 있는 침략적 공산주의의 확대 번식의 방지를 제창하는 세계 민주주의 정치세력의 여론은 서구를 중심한 북대서양동맹과 동 성질의 극동 공동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태평양 인접 민주주의 제국 간의 공동정치목표를 위한 방위동맹 체결 촉구의 소리가 높은데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반을 이룬 5·10 총선거 1주년을 맞이하고 9일 국내 중요 정당·사회단체에서는 현하 당면한 정치문제에 언급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國民會



1. 38선은 미소의 책임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또 북한에서 蘇軍의 침략공세와 그들의 지령으로 남벌을 計策하는 공산군이 준동하는 한 韓美나 태평양의 군사적 동맹을 체결한 후 철퇴함이 당연하다. 우리는 금번 개성전투 지휘자가 소군임을 지적한다.


2. 한국은 국련 결의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성립되었고 또 승인받은 당당한 국가이다. 따라 국련가입은 당연한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거부권 행사는 실로 부당한 처사로서 이는 그들의 약소국가 침략정책의 表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소련의 반성과 한국가입 거부를 취소하기를 희구하는 동시 다수 국가의 의사를 무시하는 비민주주의적 안보거부권 조항을 세계 公論에 의하여 삭제함을 강력히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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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년 총선거 대비, 남북통일의 구현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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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1. 명년에는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될 것으로 보는가

2. 남북통일 총선거가 실시되면 좌우의 비율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는가

3. 만일 명년에 통일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월남동포의 특별선거제 문제가 재대두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여기 대한 견해 여하



朝民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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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진영이 절대 다수를 점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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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獨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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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익이 다수를 점령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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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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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국진영이 절대 우세를 점령할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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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勞農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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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右二·左一쯤으로 낙착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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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靑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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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생각하는 방안으로 통일이 성취된다면 좌익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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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선거 1주년 기념사



5·10선거 1주년의 역사적 기념일에 際하여 李始榮 부통령을 위시한 정부 수뇌층과 재한 외국명사의 의의심장한 기념사의 요지는 각각 다음과 같다.



△이북의 참가요망, 부통령 李始榮:

어느덧 역사적 5·10선거의 1주년을 맞이하였다. 회고하면 기쁨과 걱정이 많다. 어느 나라와 어느 주의자들은 자기들의 방침을 고려하여 5·10선거를 절대 배격하였다.


그러나 전통적 대의명분이 있는 우리 동포들은 국제적 公然한 자유선거로 제헌과 정부수립에 일로 매진하여 蘇국가를 除하고 세계적 48개국의 일치승인을 얻어 우리 대한민국이 국제단위의 일원으로서 통일 방면에 적극 추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2주년 기념식에는 남북이 합석하여 이 기념식이 있어야 할 것을 빌어 마지않는 바이다.



△민국기초 확립, 국회사무총장 談:

1947년 유엔총회의 결의와 국내 민주진영의 열렬한 추진으로 거행된 작년에 5·10선거야말로 세기적 대성사이었다. 이것은 오로지 2천만의 애국열에서 나타난 것인데 이로써 성립된 국회는 그동안 민의를 대표하여 헌법, 농지개혁법적 중요법안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는 점차 확립되어 가고 있다. 불원 북한에도 총선거를 행하여 현재 100명의 공석을 채우고 평화와 통일이 실현될 것이다.



△민주승리를 확신, 국회의장 申翼熙:

5·10선거 당시를 회고하건대 소위 남북협상이니 지명추천이니 하여 여러 가지 비민주적인 말썽이 많았으나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유권자 총수의 9할 3푼까지가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투표하였다. 이것은 민주국가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요, 더욱이 파괴분자들의 박해와 위협이 극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전무후무의 격으로 질서정연하게 투표를 감행하였다는 것을 무능력·무조직하다고 비평하던 외국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케 하였다. 결국 민주주의의 正經大道는 반드시 통한다는 위대한 교훈을 받았다.


앞으로 우리는 하루빨리 국토를 통일하여 북한 1천만의 대표 100명을 선출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 정수를 보충하여야 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민주주의 진영 즉 민족진영이 총단결로써만 실현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진리가 점유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經原的 대원칙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요, 우리의 올바른 주장은 반드시 관철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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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49년 0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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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8.25.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흑백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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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 지역 선거는 212 선거구에 227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했다. 이는 민전 후보에 반발해 일부 선거구에 복수 후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선거 방식은 흑백 찬반투표였다. 선거 결과 전체 유권자의 99.97%인 452만 4,942명이 투표했고, 민전 후보에 대한 찬성률은 98.47%였다. 이렇게 선출된 후보들은 북한 지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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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거에서 투표율과 찬성율을 보면 제3기 대의원부터 1백% 투표에 1백% 찬성을 선전해오다가 최근 9기, 10기 선거부터는 99.78%, 99.9% 투표, 1백% 찬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선거에서 1백% 찬성이란 있을 수 없다. 결국 1백% 찬성이란 북한 헌법에 일반, 직접, 평등, 비밀선거를 규정(제89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유의사에 의해 투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2기 대의원 선거에서는 찬성자는 백함, 반대자는 흑함에 넣는 흑백함식 투표함제를 채택하였으나 1962년 3기 선거이래 단일투표함제로 바뀌었다.

찬성자는 그대로 함에 넣고 반대자는 「×」표를하여 투표함에 넣게 하고 있다. 따라서 감시자는 누가 「×」표를 하는지를 손쉽게 감시할 수 있도록 하여 1백% 찬성투표를 강요하고 있다.


대의원은 인구 3만명당 1인의 비율(제1, 2기는 5만명당이었음)로 선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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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 매일 방과 후에 요일별로 있는 그놈의 각종 회의가 사람을 잡는 것이었다. ........


..... 회의는 보통 밤 9시가 넘어야 끝나는데 자정 무렵까지 갈 때도 많았다. ........

..... 교원과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합동토론회 ...... ]



[ ......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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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나와도 노동당원 아니라 취직 못해


주지하듯 북한 정권의 수립은 1948년 9월9일이지만 이는 형식적인 의미만 있을 뿐 시질적으로는 46년 2월 이미 정권이 세워진 거나 다름없다.청진수산전문학교를 졸업했지만 나는 요즘말로 고등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취직을 하려 해도 노동당원이 아니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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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위원장인 교양주임이 사상 평가


나는 함경남도 정평군에 있는 정평중학교에 배치되었다. 교직원 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 방과 후에 요일별로 있는 그놈의 각종 회의가 사람을 잡는 것이었다. 월요일은 직업동맹회의, 화요일은 독보회의, 수요일 교양발표회의, 목요일 자아비판회의, 금요일은 문맹퇴치사업 현지지도상황 평가회의, 그리고 토요일은 주간업무평가회의가 일주일 내내 계속 이어졌다. 회의는 보통 밤 9시가 넘어야 끝나는데 자정 무렵까지 갈 때도 많았다.


이 외에도 한 달에 한 번 교원과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합동토론회라는 게 있었는데 주로 북한의 시책에 대한 찬양, 김일성 우상화, 그리고 신문에 보도되는 남한 소식에 대한 토론이었다. 남한 소식은 믿어지지 않는 미군의 만행, 경찰의 양민학살, 민중봉기 등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은 교양주임이었다. 서열은 교장과 교무주임 아래였으나 노동당원으로서 노동당 정평중학교 세포위원장인 교양주임 앞에서는 누구도, 심지어 교장도 오금을 펼 수가 없었다. 그의 사상평가 여하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 때문이다.


동료 교원들하고는 어느 누구도 마음놓고 심중을 내보일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이고 감시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동료교사가 있었으나 그는 오래 가지 않아 자아비판의 대상이 되어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9년부터 병력·탱크 등 남하 시작


교직생활에 들어선지 8개월 되던 1949년 10월 초였다. 초가을의 화창한 날씨에 나는 우연히 창밖을 내다 보았다. 우리 학교는 정펑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었는데 무개열차가 정평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무개열차에는 포신을 길게 내민 육중한 탱크와 야포, 군용트럭 등이 시트에 덮여 실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정평중학교로 배치되어 올 때 역시 무개열차가 탱크와 야포 등을 싣고 남쪽으로 달리던 게 생각났다. 반대로 북쪽을 향해 올라가는 무개화차는 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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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 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 ........ ]


[ ......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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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살다가 6·25때 월남했다는 그는 "북한에는 언론, 집회, 종교 등 남한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며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자아비판, 농민동맹 등을 수시로 해야했다…조금도 가만히 쉴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도 군생활을 10년 했지만 북한 생활은 군대보다 더 들볶이는 것이었다"라면서 "아마 휴전선에 구멍이라도 나면 이북엔 사람들이 한명도 없을 것…다 넘어오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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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주민의 생활 속엔 자유시간이 없다고 ...... ]

[ ....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국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회라는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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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인간다운 삶이 없는 곳이에요. 제가 있었던 15호 수용소 수감자들의 죄명만 해도 "김일성의 목에 혹이 났다"고 말한 사람, 김일성 석고상을 깬 사람, 김일성 초상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바른 사람, 외국 비디오를 보거나 이웃에게 돌린 사람, 남한 방송을 들은 사람, 말실수 등 정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죄도 될 수 없는 죄명으로 8년, 10년을 지내거나 또는 그 곳에서 영영 죽게 되는 겁니다"


김씨는 모든 생활이 당과 조직에 얽매여 있는 북한주민의 생활 속엔 자유시간이 없다고 설명했다. 학습, 총회, 수요강연회, 생활총화 등 일주일 단위로 모든 조직활동이 짜여져 있다. 한 사람 당 직장에서, 당조직에서, 그리고 동네 인민반장에게 3중으로 통제를 당하게 된다.


김씨는 직장생활 외 자유롭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남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생활이라고 털어놓았다. 생활 속 세세로운 사항도 "청바지를 입지 말데 대하여" "두발을 단정하게 할데 대하여" 등의 "∼에 대하여"라는 수많은 교시가 내려와 생활총화를 통해 서로를 지적하면서 통제하는 구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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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씨가 느끼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김씨가 거론한 '감동'들은 대부분 너무나 당연해 남한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생활 속의 작은 부분들이었다.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국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회라는 겁니다. 경찰서에 붙어있는 '최상의 치안서비스를 위해서'라는 말이나 공사장에 붙어있는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보고 정말 울었습니다. 모든 것이 체제우선인 북한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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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


[ ......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불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950.10.1.



[ ....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 ........ ]




[ ......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

......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 ]




“와, 38선… 김일성 목 받으러 가자”




《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다. 9·28 서울수복 후 미국 정부와 유엔이 전쟁 확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6·25전쟁 발발 후 계속 밀리기만 했던 국군이 ‘남한 사수’에서 ‘북진 통일’로 목표를 전환한 것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여기서 유래한다. 》



■ 당시 박격포 탄약수로 강원도 양양서 북진



당시 보병 3사단 23연대 제1중화기중대 박격포 소대 탄약수로 강원 양양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었던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82세·당시 이등병)으로부터 1일 60년 전 북진 과정을 들었다.


“9월 18일 포항을 탈환한 뒤 승승장구하며 9월 30일 오후 강원 양양에 다다랐습니다. 38선이 보였어요. 병사들이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라고 환호하는데 갑자기 정지하라는 겁니다. 북진을 놓고 유엔군과 이견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죠. 하루 쉬고 기력을 충전한 뒤 진격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단독으로 38선 이북으로 북진했다. 동부전선을 관할한 육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오른쪽)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기념비에는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실 잇단 승전으로 사기는 충천했지만 보름 동안 매일 70∼80리 행군을 하며 북상한 장병들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자 보급이 거의 안됐습니다. 군화도 고무신 밑창에 헝겊을 씌운 형태였어요. 그나마 고무 두께는 1cm도 되지 않았죠. 끔찍할 정도로 발에 물집이 생겨 쩔뚝이면서 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마밭에서 숙영을 마친 10월 1일 오전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장병들은 서로를 얼싸 안았다. “철모와 군복에 나뭇가지와 풀을 꽂고 신이 나서 38선을 넘었습니다.” 이 부대가 38선을 넘은 공식 시간은 오전 11시 45분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38선을 넘은 뒤 가장 처음 마주친 사람은 허름한 주막에 있던 마을주민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그때의 감격은 말할 수 없습니다. 발 아픈 건 까맣게 잊게 되더군요.”


선물은 또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배 속으로 들어가는 사과가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보급이 안돼 전날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거든요. 그렇게 북진의 첫날이 시작됐습니다.”


38선 이북의 북한군은 무력했다. 전쟁 초반 막강했던 인민군이 아니었다. “싸울 의지라는 게 거의 없었고 (전투라는 게) 패잔병 잔당을 소탕하는 수준이었죠.”

몇 차례 공방전을 치르며 그는 10월 9일 원산 시가지에 도착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아침에 시가지에 들어가니 미루나무에 70여 명이 죽은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퇴각하며 교도소에서 끌어내 죽인 것 같았어요. 시신을 살펴보니 몸이 채 굳지도 않았어요. 몇 시간만 더 일찍 들어갔으면 이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전쟁 내내 저를 괴롭혔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11월 말에는 함북 길주를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개마고원에도 올라갔다. “두만강이 코앞에 있었습니다. 통일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레 춥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12월 1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남하하다가 함북 경성에 도착해서야 중공군에 밀려서 철수하게 됐다는 걸 알았어요. ‘부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막막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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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1002/31554739/1

국군의 날 유래된 1950년 10월 1일 38선 첫 돌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그날’ 증언

2010-10-02








1950.10.29. 평양


[ ....... 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 ......... ]



[ .....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

통일된 자유조국을 위하야 싸워나갈 것을! ...... ]



[ ..... 시민들은 감격의 열루를 흘리면서

“우리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 ....... ]



1950. 10.31일자 조선일보 2면



이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39년동안 그리든 곳에



[평양에서 대한통신 특파원] 이(李)대통령은 29일 오전 8시35분 미군 항공장교 2명이 조종하는 C-47 미군 특별비행기로 그간 해외풍상 39여년간의 망명생활에서나 또한 4278년10월 환국한
이래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잃었던 우리의 국토 일부 북한 줌심도시 평양을 향하야 역사적인 여도에 올랐다.


29일 오전 8시 35분! 이대통령 일행을 실은 특별 비행기는 폭음도 경쾌하게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비행장 상공을 일주한 뒤 기수를 북으로 돌려 일로 북으로 북으로. 오전 8시 45분 개성을 지난 비행기는 과거 5년간 우리 자유한국의 허리를 끊어 자의로 동포를 괴롭히며 갖은 비극과 민족적 악몽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마의 적경(赤境) 38선을 뚫고 일로 북한으로 돌진하였다. 기자는 폭음 관계로 “각하의 심경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서면 질의를 제출하엿더니

각하께서는 친히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감상을 적어주셨다.

“본인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9년전인 1911년이었다.

이제 39년만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기뿌다.

그보다도 세계정복만을 일삼는 외세에 의하야 과거 5년간 분단되었든 우리 조국이 다시 통일 되니 더 한층 기뿌다.

이때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는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가 모든 문명국가와 힘을 합하야 나가는 이상 다시 우리나라를 분단함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국가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나갈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무한한 감개에 싸여 아름다운 조국산천초목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시속 160 마일의 속도로 비행하야 어느 듯 대동강을 지나 평양시 일각에 기수를 들여놓았다.

우리기가 밟은 코스는 서울서 개성까지는 북으로 직행, 개성서부터는 약간 서북방향을 취하야 재령 사리원 황주를 거쳐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이른 것이다.

오전 9시30분 비행기는 약 150마일의 양도시간 거리를 불과 55분 밖에 안걸려서 평양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단기 4283년(1950) 10월29일 오전 9시30분 역사적인 평양 입성의 제일보를 들여놓으신 이대통령 각하께서는 비행기 앞에서 조종사도 포함하야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신 뒤에 아군 제O군단장 백(白) 준장(평양 제1착돌입 맹장)등 제장성들의 인사를 받으신후 그 노고와 분투를 치하하셨다.

이어 대통령 각하께서는 미군과 아국군 의장병이 전후로 보위하는 가운데 찦차로
한때는 피로 물드렀든 대동강을 건너 소위 김일성대학촌을 보시면서 대동강변을 지나
기림리를 거쳐 소위 쏘련 위성국가 수도였던 평양을 아국군과 유엔군이 연도에 도열한 가운데 일보일보 입성하시었다.


평양 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 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리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소리도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한영하는 프랑카드와 아치 문이 처처에 보였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쏘련에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 오던 살인 방화의 마전이었든 지금은 평양시의 새살림집이 된 평양 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39년만의 평양...환호성 천지를 진동



평양시에 무사히 역사적인 제일보를 드딘 이대통령은 평양시청에서 박현숙 권옥희 양씨의 인사를 받은 다음 평양시 관리위원회 위원장 임정득씨를 비롯하야 부위원장들을 인견하고 간단히 시 운영상황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성심성의 노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 미국 임시민정관 벨파이어 대좌와 힐 중좌도 인견하고 위무한 다음 약 5만여명에 달하는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리에 발코니에 나섰다.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이대통령 환영대회서 유시


조국이 일제기반으로부터 광복된 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은...(판독불가)....태극기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든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야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들....(판독불가)....

이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주악.....(판독불가)......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판독불가)..한복의 대통령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약 한시간에 걸쳐 간곡한 인사말씀과 유시를 하시었다.


▲ 국군이 탈환한 평양을 방문, 시청 앞 5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본인이 39년 만에 다시 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아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제2차대전후 적국 일본이 패망하자 자유조국이 독립하여 즐거운 신생활을 할 줄 알었드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쏘련이 하등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비법적으로 우리나라를 양단하여 38선이란 운명의 선을 그었습니다. 쏘련은 김일성 공산도당을 시켜 한국의 쏘련 예속화를 위한 충성을 다하도록 교사하는 한편 방화 약탈을 감행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우리 향토 국토를 더럽혔습니다.

그동안 2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이 재산과 가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우리는 없는 것은 너로 노나 먹으면서 화해롭게 살아왔습니다. 이북에서 피난해온 동포들은 그 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공산당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눈부신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중 많은 사람들이 민주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쏘련은 소위 막부(모스크바) 삼상(三相)결정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에 두고 자기의 위성국가화 하려고 가진 모략과 술책을 다하여 왔으나, 우리는 죽음을 걸고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왔습니다.


좌우합작이니 뭐니 가진 방법을 쓰다못해 실패에 돌아가자 쏘련은 무기를 김일성에게 주어 급기야는 지난 6월25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침범하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전국을 정복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려하여도 여러 가지 국제관계상 무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쏘련이 대한민국의 무비가 약한 것을 보고 침략을 한 것은 어느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목전의 침략에 눈이 어두어 대한민국 뒤에 53개국의 자유민주진영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의 우방 53개국의 평화애호 국가는 24시간 내에 자유을 위해 총궐기하여 오늘날 우리국군을 도와 용감히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쏘련은 필시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를 위하야 전세계가 다 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요,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앓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쏘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오,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어하기 위하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대한사람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부흥건설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도지사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 같이 모자라는 것은 노나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 속히 교통이 통하는 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릴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 살림을 하려고 하는 바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무초 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모든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유엔도 만사를 잘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와서 누가 남쪽사람이니 북쪽사람이니 하거든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지목해두어 규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본인이 필요하시거든 청해주십시오.

다 같이 의논하야 살아가십시다.



끝으로 여러분이 당장 필요한 화폐사용도 관계자들에게 일러두었으니 상의껏 경제재건을 위하야 노력하야 주십시오.

자, 여러분! 다시 한번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통일된 자유조국을 위하야 싸워나갈 것을!“



약 한 시간에 긍한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가 끝나자 시민들은 감격의 열루를 흘리면서

“우리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하며 대통령의 유시에 보답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리하야 식은 오전 11시55분 국방부 전훈국파견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원만히 끝났는데 자유의 종소리는 자유로운 행복된 금일을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울렸다.



식 종료후 대통령은 이별을 아까워하는 시민들 속을 지나 열광적 환송속에

“대통령각하 만세” 소리를 뒤에 들으시면서 수행원을 대동하시고 비행기에 탑승하야 일로 서울로 귀환 하오 한시 반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조선일보, 1950. 10.31)








1951



[ ...... 겉으로는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다는 그 毒牙 품은 가면을 온 민족은 뚜렷이 봤다. ...... ]


[ ..... 헐벗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로운 땅을 찾아온 것 ......

..... 아는 자유, 알고 싶은 자유, 알리는 자유가 완전히 속박 ......

..... 우리는 비판의 자유를 티끌만큼도 그들에게서 향유한 일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벙어리의 3개월을 ......

..... 북한동포의 전부가 가슴속에 가다듬고 있던 심정 .......


인간의 정당한 지성과 감정이 응당 향유해야 할 온갖 자유를 압살 당하는 그러한 교육 ....... ]




월남민·피난민들의 공산체제 경험담




게재지명 민주신보

게재일자 1951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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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공산 魔風에 견디지 못하여 수백만이 넘는 동족이 우리의 부모형제와 아들 딸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세계 역사상에 한 민족이 이러한 수난과 이러한 비애를 겪어온 일이 어디 있었던가.

한 핏줄을 반만년이나 타고 나온 동족에 이렇게 모진 운명의 십자가를 누가 강요했는가. 대한의 온 겨레의 평화롭고 안락한 꿈을 그 어느 누가 깨뜨렸는고…….

이제야 우리 삼천만 동포는 다 봤다. 겉으로는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다는 그 毒牙 품은 가면을 온 민족은 뚜렷이 봤다. 허위·약탈·학살·포악이 붉은 무리들이 자랑하던 그 정치의 전부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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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궁이 극도, 농민 朱씨:무슨 會인지 회의 때마다 놈들은 나보고 하는 말이 中農이라고 합디다. 허기야 답 2,000평 가량하고 田 4,000평 가량 경작을 하니 남한농가로 친다면 그리 옹색한 실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농가는 나보다 더 많이 농사짓는 농가도 살림살이는 남한농민보다 훨씬 곤궁하지요.


현물세라는 것이 말로는 전곡의 2割 3分, 稻作이 2할 7분이라고 하지만 알알이 세고 재고 심지어는 마당가의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대까지 현물세로 샅샅이 털어가니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놈에 2개년계획은 농민이 굶어 죽는지 부어 터지는지 그 따위 것은 조금도 상관치 않고 초과 달성해야 한다고 모두 털어 가지요.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래도 죽을 끓여 먹어도 제 고향에 박혀 있을려고들 하겠지만, 지방자치세니 국가동원이니 해서 2년에 20일 이상 노력자는 모두가 광산·탄광으로 강제노동으로 끌려가야 하고, 가마니 공출은 노력자 매 인당 20매 이상 바쳐야 하니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북한은 실지로는 농민을 소나 말 같이 부려먹는 것입니다.



그게 다 군인에게 준다는 獸肉費로 耕作地田 1町步에 정육 8斤, 답 1정보에 16근씩 洞里마다 소 5·6頭씩 바쳐야 하고, 무슨 희사니 열성미니 애국미니 하여 바치는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걸 내 놓기를 꺼려한다면 어디서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끌려가는게 공산독재 치하올시다.

그러니 이것저것 다 바치고 나면 빈농가는 설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그래도 조금 낫다는 중층이라야 3월달 밭갈 머리까지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품삯벌이라도 하려니 도로경비니, 철도경비니, 세곡경비니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에 벌이를 할 여가가 없습니다.



하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사람은 소위 노동당 간부와 인민위원회 간부들 뿐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원래가 자작농이었지만 과거에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거기에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인권을 유린, 노동자 宋씨:나는 과거 5년 동안 북한에서 제철노무자 생활을 해왔다. 나는 과거의 근로자 생활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북한 괴뢰정권이 표면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그들의 소위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고 뻔뻔하게 떠들어대면서도 그 실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진보적 노동법의 혜택을 받는다고 하지만 8시간 노동제가 분명히 위반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생산돌격이니, 목표달성이니 하는 아름다운 구호를 내걸고 8시간 노동시간을 유린하고, 둘째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견지에서 사회보험제 같은 것을 실시하고 있으나 이도 그 실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언사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근로자의 이익과 근로자의 모든 자유를 보장해준다면 이 나라 근로자들이 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할 리 있겠는가? 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이 공장과 농토까지 버리고 심지어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산천까지를 버리고 남
2021-03-02 00: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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